영화 『매트릭스』분석 : 4. 거짓된 원형(原形)


- 대답해줄 수가 없네요. 나도 내가 어떻게 여기 왔는지. 여기가 어딘지도 모르지만.......

- 여긴 우리 세계와, 당신 세계의 중간 지대죠.[각주:1]


3부는 네오가 현실과 매트릭스의 중간 지대에 갇혀있는 시점에서 시작된다. 이 중간 지대는 프랑스인, 메로빈지언의 부하 트레인맨이 프로그램을 밀거래할 때 사용하는 통로로 만들어둔 곳이다.


매트릭스에는 인간만 존재하는 게 아니라, 세계를 구성하고 관리하는 다양한 프로그램이 존재한다. 그 중 일부는 스스로 프로그램을 만들어 내기도 한다. 메로빈지언이나 키메이커 같은 인물이 프로그래머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 크게 생각하면 매트릭스라는 프로그램을 만든 것 역시 설계자(아키텍트)라는 프로그램이기 때문에, 프로그램이 프로그램을 만드는 게 이상하게 여길 일은 아니다.



- 꼭 기차를 타야 해.

- 안 되지, 안 돼. 메로빈지언이 허락하면 타. 내 생각엔 기차 타긴 영영 힘들 걸?

- 당신을 해치기는 싫어.

- 못 알아 듣는군. 여긴 내가 창조한 곳이야. 여기선 내가 곧 법이고, 진리야. 여기서는 내가 신이야![각주:2]


중간 지대에서 네오는 특별한 힘을 발휘하지 못하고 트레인맨에게 당한다. 이 장소에 한하여 트레인맨은 네오, 혹은 설계자와 동급의 힘을 지닌다. 중간 지대라고 했지만, 이 장소는 그저 매트릭스의 통제권 밖에 존재하는 저장소에 불과하다. 매트릭스 내의 삭제를 피하기 위한 저장소. 삭제 될 프로그램은 일시적으 이 곳으로 와 삭제를 회피한다. 매트릭스는 프로그램이 사라졌음을 감지하고 삭제를 완료했다고 생각한다. 이 시점에서 삭제 명령은 완수되어 사라진다. 그 후에 열차를 타고 다시 매트릭스로 회귀하면, 프로그램은 매트릭스의 삭제 명령 밖에 존재하게 된다.



『매트릭스 2 : 리로디드』에서 네오는 프로그래머들이 드나드는 뒷문을 본 적이 있다. 네오는 이를 이용해서 설계자를 만났다. 이 장소로 들어왔을 때, 함선에서 상황을 지켜보던 모피어스 일행은 네오의 행방을 찾을 수 없었다. 매트릭스 내에서도 그 모습을 감췄다는 뜻이다. 분명히 매트릭스에 존재하는 장소지만 외부에서는 그 존재를 확인할 수 없으며, 코드를 지니지 않으면 드나들 수 없는 장소다.


트레인맨이 만든 중간 지대도 이와 비슷한 장소라고 할 수 있다. 때문에 일반적으로 인간이 들어올 수 있는 장소가 아니다. 그렇다면 네오는 어떻게 접속도 하지 않은 채 중간 지대에 들어오게 됐을까?



네오는 열차가 지나간 통로를 통해서 중간 지대를 빠져나려 하지만, 반대편 통로로 다시 돌아올 뿐이다. 네오는 자력으로 이 곳을 빠져나갈 수 없다. 



네오는 자기 스스로 이 곳에 들어왔으니, 빠져나가는 것도 자신에게 달려있다고 생각한다. 의식을 집중하는 그의 머리속에 기계적인 이미지가 떠오른다. 저 이미지는 하나의 장소이며, 네오가 도달해야 하는 곳이다. 네오는 이미 그 곳을 알고 있다. 모든 시작이 그 곳에서 이뤄졌고, 끝이 맺어질 장소이기도 하다.


모피어스와 트리니티에 의해 중간 지대에서 빠져나온 네오는 해답을 얻기 위해서, 여태까지 그랬던 것처럼 오라클을 찾는다.



- 접속 하지 않고 내가 어떻게 역(중간 지대)에 간 거죠? 센티넬은 어떻게 처치했고? 내게 무슨 일이 생긴 거예요?

- '그(The One)'의 힘은 현실을 초월해. 그 근원에 다다를 만큼.......

- 근원?

- 소스. 센티넬을 처치할 때 느꼈지만, 자네는 받아드릴 준비가 안 됐어. 죽지 않은 것도 같은 이유일 거야.[각주:3]


우리는 여태까지 '그'의 힘이 매트릭스 내에 국한되었다고 생각했다. 매트릭스가 가상의 세계라는 진실을 인지하고만 있다면, 통제에서 벗어나 규격 외의 힘을 발휘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매트릭스 1』에서 다뤘던 내용이다. 그러나 『매트릭스 2 : 리로디드』에서 봤듯이 매트릭스는 가상 세계임은 확실하지만, 진실은 아니었다. 참된 진실은 매트릭스 너머 시온마저도 설계자의 통제 아래에 있다는 사실이다. 앞 선 다섯 명의 네오는 이 사실을 깨닫자마자 확실하게 인류를 보존하는 길을 선택했고, 현재 네오는 트리니티를 구하는 선택을 했다.


우리는 『매트릭스 1』에서 원형이 탄생되었다고 믿었지만, 이는 이미 일어났던 일에 불과하다. 『매트릭스 2 : 리로디드』에서 네오가 전혀 다른 길을 선택하기 전까지 그는 앞 선 다섯 명의 반복, 모방, 복제에 지나지 않았다. 트리니티를 구하는 그 순간, 비로소 진정한 원형이 된 것이다.


오라클은 '그'가 근원에 다다를수록 현실의 초월하는 힘을 지니게 된다고 말했다. 네오가 센티넬을 느끼고 처치할 수 있었던 건, 전보다 근원에 가까워졌기 때문이다. 그 과정을 통해서 네오는 직접적으로 근원, 소스를 접했지만 받아드리지는 못했다. 아직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근원, 소스를 받아드리기 위해서는 우선 이해가 필요하다. 매트릭스는 물론이고 시온마저도 거짓, 복제, 모방이라는 사실에 대한 이해. 여태까지 모피어스가 믿어왔던 예언, 구원자, 네오에 대한 것까지 모두 거짓이었다는 이해. 여태 자기 자신이 스스로 걸어왔다고 믿어왔던 길이, 사실은 설계자와 오라클에 의해 정해진 길이었다는 이해. 인간은 기계에게 지배 당하고, 통제 받고, 잠들어 있다는 진실에 대한 이해. 무엇보다 네오마저도 반복 속에서 만들어진 모방에 불과하다는 이해가 필요하다.


네오는 『매트릭스 3 : 레볼루션』에 이르러서 이 모든 사실을 이해한다. 그리고 『매트릭스 1』에서 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누구도 하지 않았던 선택을 통해, 다시금 원형으로 거듭나게 된다.





  1. 영화 『매트릭스 3』 中 [본문으로]
  2. 위와 같음 [본문으로]
  3. 위와 같음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