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리지널, 그리고 복제에 대해 『시뮬라시옹』



이론서나 철학서는 언제나 긴장한 상태로 읽게 된다. 어느 한 순간 내용에 심취하여, 마치 책의 내용이 세상의 유일한 진리인 것처럼 받아들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맹목적이고 광적인 믿음은 언제나 위험하다. 이성은 항상 의심하라 말한다. 때문에 이런 책을 접할 때는 이성을 칼 같이 갈아두고 읽어야 한다. 나 스스로를 보호하고, 내 세계를 보다 강하고 견고하게 다지기 위해서 말이다.


책 제목인 '시뮬라시옹'은 Simulation 시뮬레이션의 불어 발음이다. 시뮬레이션으로 표기되지만, 갖고 있는 의미가 다르다. 사전을 찾아도 '시뮬라시옹 이론'이 따로 나와 있다. 이 책은 시뮬라시옹 이론을 담고 있는 이론서다. 원제는 『Simulacres & Simulation 시뮬라르크와 시뮬라시옹』이다. 


'시뮬라시옹'이란 '시뮬라크르'의 동사형, 즉 '시뮬라크르 하기'이다. 그렇다면 우선 시뮬라크르가 무엇인지 알 필요가 있다.


시뮬라크르는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대상을 존재하는 것처럼 만들어놓은 인공물을 지칭한다. 의미가 복제나 위조, 모방과 겹치지만, 결정적인 차이가 있다. 시뮬라크르는 실제, 원본 이미지 그 자체로서 현실을 대체하고, 현실은 이 시뮬라크르의 이미지에 지배 당하게 된다. 현실보다 더 현실적인 인공물. 그게 시뮬라크르다. 책에서는 이 내용을 설명하면서 현대 전쟁을 예로 든다. 


미사일 발사는 화면이라는 컴퓨터로 보면서 하지 실제 미사일의 움직임을 육안으로 보면서 하지 않는다. 이때 시뮬라크르인 화면상의 미사일 궤도는 실제 탄의 궤도일 것이며, 더 나아가 실제 탄이 목표에 맞았는지 맞지 않았는지는 이제는 중요치도 않게 되어버렸다. 결국 시뮬라크르는 실제보다 더 실제적인 것이다.

- 『시뮬라시옹』 中


 





무슨 말인지 난해할 뿐이다. 이해하기 위해서는 읽고, 읽고, 읽기를 몇 번이나 반복해야 한다. 형광펜을 꺼내들고 밑줄까지 그어가며 읽었다. 여전히 내게는 난해한 이론이지만, 어렴풋이는 알 수 있을 것 같다.


애초에 책에 있는 내용을 모두 이해하고자 한다면, 그건 욕심이다. 그런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책을 사용하는 방법에서 이야기했듯, 책 본연의 목적은 '사고를 하게 하는 것'이지 '지식의 전달'이 아니다. 책 내용을 전부 이해하지 못했다고 해서, 잘못된 독서를 한 건 아니다. 어떤 식으로든 독서가 당신의 생각에 영향을 미쳤다면, 충분히 훌륭한 독서를 한 거다.





본문보다 각주 내용이 더 길다. 이런 책은 처음이었다. 순간 지나가면 본문을 읽는 건지, 각주를 읽는 건지 알 수 없게 되어 버린다.


사실, 내가 이 책에 관심을 갖게 된 이유는 영화에 있다. 영화 『매트릭스』에 대해 분석문을 쓰기 위해서 처음 이 이론을 접했다. 『매트릭스』의 제작자 워쇼스키 형제(남매)는 『시뮬라시옹』을 모티프로 영화를 제작했다고 밝혔다. 주연 배우들에게는 직접 이 책을 건네주고 읽도록 했다. 영화에서는 '매트릭스'라는 가상 세계에서 벌어지는 사건을 다루고 있다. 가상 세계. 시뮬라크르. 해서 이 영화를 분석하기 위해서는 『시뮬라시옹』에 대한 이해가 필요했다.





영화 초반, 해커로 활동하며 복제 프로그램을 판매하는 앤더슨(키아누 리브스)의 모습이다.

판매하는 복제 프로그램을 보관해둔 저 책의 제목이 보이는가? 바로 이 『시뮬라시옹』이다. 이 영화는 시뮬라시옹을 이해하는 관점에서 분석하면 완벽하게 이해할 수 있다. 이미 수많은 사람들이 매트릭스에 대해서 다양한 관점을 가지고 분석을 했다. 단순히 영화적인 관점부터 시작해서 종교적인 관점으로 분석한 이도 있다. 충분히 근거가 있고 논리적으로 타당한 분석들이 많지만, 그래도 나는 시뮬라시옹을 빼놓고 이 영화를 말하는 건 어불성설이라고 생각한다.


『시뮬라시옹』의 저자 '장 보드리야르'는 자신의 이론은 소설이나 영화 같은 이야기로 풀어낼 수 없는 것이라고 단적으로 말했지만, 개인적으로 느낄 때 『매트릭스』는 그의 이론에 충실한 면이 많이 있다. 이에 대해서는 따로 리뷰를 쓸 예정이다. (그렇지만 분석문을 쓰는 일은 언제나 피곤한 작업이기 때문에......)





가상세계와 현실. 실제와 부제. 오리지널과 복제. 이에 대해 심오한 생각을 하고 싶다면 이 책을 추천한다.

그리고 나처럼 영화 『매트릭스』의 분석문, 논문을 써야 할 학도들에게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