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매트릭스』분석 : 5. 시뮬라크르, 그리고 종말

시뮬라크르가 끝에 이르면 더 이상 복제할 대상이 없어진다.


하나의 원형에서 시작된 이미지가 끊임없이 생성되어, 결국 원형마저 뒤덮는다. 이후 복제된 이미지는 복제할 대상을 찾지 못한다. 어디에도 원형은 남아있지 않다. 세상이 시뮬라크르 그 자체가 되는 셈이다.


장 보드리야르는 실재가 실재하는 것이 아닌 파생실재로 전환되는 작업이 시뮬라시옹이고, 모든 실재의 인위적 대체물이 '시뮬라크르'이며, 현대인은 가상실재인 시뮬라크르의 미혹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이처럼 가상실재가 실재를 지배하고 대체하여 재현과 실재의 관계가 역전됨으로써 더 이상 모사할 실재가 없어진 시뮬라크르들은 실재보다 더 실재 같은 하이퍼리얼리티(극사실)를 생산해낸다는 이론을 이어나갔다.[각주:1]


매트릭스는 이 과정을 성실하게 이행한 결과물이다. 과거 인간들이 지배했던 세계는 무한히 복제되는 기계들에 의해서 멸망을 맞이했다. 이후 인간의 시대는 종말을 맞이하고 기계, 설계자는 인간들의 시대를 재현하는 매트릭스를 구현한다.


원형 → 시뮬라크르 → 극사실(거짓된 원형)


그러나 명확하게 설계자는 매트릭스를 극사실, 그러니까 진짜 보다 더 진짜 같은 세계로 만들지는 못했다. 설계자의 목적은 극사실의 완성에 있다. 때문에 인간을 살려두는 것이다. 아직 완벽한 복제를 하지 못했기 때문에 그 원형이 남아있는 것이다. 설계자의 매트릭스가 극사실로서 완성된다면, 그 때 인간이 모두 사라지게 될 것으로 볼 수 있다.




- 시작이 있는 것엔, 끝도 있지. 끝이 가까웠어. 어둠이 번지고 있어. 죽음이 보여. 그를 막을 자는 자네뿐이야.

- 스미스?

- 그는 곧 이 세계를 없앨 힘을 갖게 돼. 허나 거기서 안 멈추고 모든 걸 파멸시킬 거야.

- 그는 누구죠?

- 자네지. 자네의 대칭점. 스스로 균형을 맞추려는 방정식.

- 그를 못 막으면?

- 어느 쪽이든...... 전쟁은 결국 끝날 거야. 두 세계의 미래가 둘의 손에 달렸어. 자네나, 스미스.[각주:2]




네오와 스미스, 대칭되는 두 인물이 모두 오라클을 찾아온다. 우리는 이 장면에서 가정했던 두 인물의 관계를 확신할 수 있게 된다.


오라클은 네오에게 스미스가 '그는 너다'라고 얘기한다. 네오의 원형으로 인해 탄생한 복제라는 사실을 확인시켜주는 대사다. 또한 두 인물의 대칭을 보여주기 위해 앵글은 방향을 비튼다. 네오와 오라클이 있는 위치와 스미스와 오라클이 있는 위치는 정반대다. 




그리고 스미스는 마침내 오라클마저 복제하기에 이른다.


『매트릭스 2 : 리로디드』에서 설계자는 오라클을 자신보다 완벽하지 않은 지능이라고 말한다. 그 결정적인 차이는 직관력에 있다. 직관은 감각, 경험, 연상, 판단, 추리 따위의 사유를 거치지 않고 대상을 직접적으로 파악하는 것을 의미한다. 오라클은 매트릭스에 존재하는 인간, 프로그램을 단순한 직관으로 파악한다. 딱히 머리를 쓰는 게 아니라, 그저 보는 것만으로 알 수 있다. 오라클은 그런 존재다.


때문에 프랑스인, 메로빈지언이 오라클의 눈을 원했다. 오라클의 눈만 있다면 직관력을 얻을 수 있으리라는 믿음 때문에. 스미스가 오라클을 복제하고, 그녀의 눈을 차지하고 선글라스를 벗은 채 웃는 건,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매트릭스를 파악할 수 있는 직관력을 느꼈기 때문이다. 이제 스미스는 매트릭스에 존재하는 모든 것을 파악할 수 있게 됐다. 매트릭스 자체를 위협하는 존재가 완성된 것이다.


오랜 생각 끝에 네오는 시온을 구하기 위해, 전쟁을 끝내기 위해 가야할 곳이 어딘지 확신하게 된다. 중간 지대에서 보였던 곳. 의식을 집중하면 눈에 그려지는 곳. 모든 것이 시작되었던 곳. 기계의 도시로 향하고자 한다. 


다른 선원들은 이해하지 못한다. 선원들에게 있어서 실재하는 것, 원형은 시온이기 때문에 당연히 시온으로 향하고자 한다. 선원들에게 기계의 도시는 피하고 싶은 장소일 뿐, 어떠한 진실로 받아드려지지 않는다. 그러나 기계 도시가 인간들이 당면한 현실이고, 시온이야말로 설계자에 의해 통제되고 있는 거짓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네오는 알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기계 도시로 가고자 한다.



- 뭘 원하나?

- 네가 원하는 것. 그래, 이제 알겠나? 자세히 봐. 썩은 눈알 속에 숨은 네 적이 안 보이나?

- 아니야!

- 부인하지 마, 미스터 앤더슨.

- 말도 안 돼.

- 네가 어딜 가든, 난 찾을 수 있어.

- 불가능해.......

- 가능해. 이건 필연이야. 잘 가, 미스터 앤더슨.[각주:3]


『매트릭스 2 : 리로디드』에서 스미스는 베인이라는 인물을 복제한 상태로 통신을 통해 현실의 베인 속으로 들어갔다. 네오를 살해하려 시도했지만 실패로 돌아가고, 베인인 척 살아가며 네오를 죽일 기회를 호시탐탐 노렸다. 스미스는 함선에 숨어들어 네오를 죽일 기회를 맞이한다.



둘의 전투에서 네오는 눈을 잃게 된다. 그러나 눈이 보이지 않게 됨으로써 네오는 더욱 근원에 가까워진다.



- 네가 보여.[각주:4]


네오의 눈에 보이는 세상은 거짓이다. 모두 설계자에 의해서 통제되고 있는 세상이다. 눈을 잃으면서 네오는 거짓된, 복제된, 이미지에 현혹되지 않는다. 오히려 진실을 마주하는 능력을 얻게 된다.




네오는 베인의 모습은 보지 못하지만, 안에 존재하고 있는 스미스의 모습은 볼 수 있다.


거짓된 껍데기가 아니라 직관적으로 대상을 파악하게 된다. 네오는 현실에서도 원형으로서의, '그 The One'으로서의 능력을 발휘하기 시작했을 뿐만 아니라, 마치 오라클과 같은 힘을 갖게 된 것이다.



트리니티의 목숨과 맞바꾸어 네오는 기계의 도시에 도착한다.


보이는 건 차가운 세상이지만, 네오의 시선에는 마치 태양처럼 빛나는 세상으로 보인다. 네오는 설계자를 만나 스미스를 제거해주는 대가로 시온의 평화를 제안한다. 설계자는 이 제안을 수락한다.


매트릭스는 통제 프로그램에 불과하고 설계자가 포기한다면 완전히 제거할 수도 있다. 그러나 설계자는 네오의 거래에 응한다. 그 이유는 앞서 말했던 것처럼 설계자의 목적이 완벽한 극사실의 구현에 있기 때문이다. 설계자는 인간을 에너지원으로만 사용하는 게 아니라 이성, 감각, 연상, 추리 따위로 파악하고자 한다. 그래야만 진짜 보다 더 진짜 같은 세상을 구현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때문에 인간이 사라지면 설계자는 목적을 달성할 수 없다. 목적을 잃게 된다.


목적을 잃은 이미지는 어떻게 될까?




매트릭스의 세계로 접속한 네오는 스미스가 정복한 세상을 마주한다. 세상은 오직 스미스로만 이루어져 있다. 수많은 복제, 이미지, 시뮬라크르로 뒤덮인 세상. 이건 원형(네오)에 대한 살상력이 극대화된 세상이다. 설계자가 극사실화 하고 싶은 대상이 '인간들의 세상'이라면, 스미스가 극사실화 하고 싶은 대상은 '네오'다.


스미스가 했던 행동은 모두 네오를 따라가기 위한 것이었다. 네오가 자신에게 했던 것처럼 다른 프로그램을 덮어썼다. 네오를 이해하기 위해서 더 많은 프로그램을 복제했다. 그리고 자신이 네오 보다 더 네오 같은 존재가 되기 위해서, 끝내는 네오를 죽이고, 네오 그 자체를 복제하기를 원하는 거다.


수많은 스미스 중, 단 한 명의 스미스가 걸어나온다. 이 스미스는 오라클을 덮어쓴 복제다. 스미스 중에서 가장 네오와 가까운 존재이기 때문에 그 혼자 네오를 맞이한다. 



- 미스터 앤더슨, 돌아온 걸 환영하네. 보고 싶었어. 내 실력 잘 봤나?

- 오늘 밤이면 끝나.

- 알아, 늘 그래왔지. 내 분신들도 기대에 들떠있어. 내가 승리할 걸 알고 있으니까.[각주:5]



전투신이 나오기 때문에 잠시 연출에 대한 이야기를 하자면, 매트릭스는 연출에서 많은 작품들을 따라했다. 


감독인 워쇼스키 형제(남매)가 일부러 이런 방식을 선택한 것이다. 기본적으로 격투 액션에서는 중국 액션 영화의 모션을 따라했고, 하늘을 날아다니는 모션은 히어로(예를 들면 슈퍼맨)의 모션을, 거대한 폭발이나 강한 힘이 작용하는 장면은 블록버스터 재난 영화를 모방했다. 시리즈를 진행하면서, 스스로 이전 시리즈의 연출을 모방하기도 한다. 감독은 영화의 시나리오 뿐만 아니라 영화 자체에 시뮬라시옹 이론을 녹여내려 한 것이다. (정작 시뮬라시옹 이론을 제시한 장 보드리야르는 '누구도 이 이론을 작품이나 다른 것으로 표현할 수 없을 것'이라고 말했지만)



- 왜 이러는 건가, 미스터 앤더슨. 대체 왜? 이유가 뭐야? 왜 포기하지 않지? 왜 계속 싸우는 거야? 자신까지 희생하며 뭘 지키겠다는 거야? 그게 뭐야? 뭔지는 알고 있나? 자유? 진실? 평화? 사랑? 다 환상이고 망상이야! 의미 없는 자신의 존재를 합리화시키려는 나약한 몸부림이지. 모두 조작된 거야! 매트릭스처럼 말이야! 물론, 사랑놀음은 인간의 전유물이지만...... 이젠 너도 깨달아야 돼. 넌 못 이겨 헛수고 하지 마! 왜, 대체 왜 포기하지 않는 거야!

- 그게 내 선택이야.[각주:6]


둘은 막상막하로 싸우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스미스가 우세해진다. 그러나 네오는 포기하지 않는다. 다시 일어나 스미스와 싸우기를 반복한다. 스미스는 그런 네오의 행동을 이해하지 못한다. 직관력을 얻었다 한들 스미스는 복제, 이미지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가 여태까지 보아왔던 복제, 이미지는 목적을 가진다. 그리고 『매트릭스 2 : 리로디드』에서 스미스는 이미 목적에 대해 이야기한 바가 있다. 복제, 이미지에게는 단 하나의 목적, 극사실화에 대한 목적이 존재한다. 진짜 보다 더 진짜다워지려 하는 목적.


그러나 원형에게는 뚜렷한 목적이 없다. 목적이라고 할 게 존재하기는 하지만 뚜렷하지는 않다. 확실하지 않다. 달성할 수 있을지 없을지 모른다. 그렇기 때문에 언제나 선택의 기로에 선다. 선택을 한다고 해서 반드시 그 결과가 나오는 건 아니다. 나오기를 희망하는 거다. 때문에 선택 자체가 중요한 게 아니라, 선택을 하는 이유가 중요하다. 어떤 의도를 가지고, 어떤 바람을 가지고 선택을 했느냐. 『매트릭스 2 : 리로디드』에서 오라클이 했던 말은 이런 뜻이었다.



- 내가 받을 걸 알고 있나요?

- 그걸 모르면 오라클이 아니지.

- 벌써 알고 있다면 난 어떻게 선택을 해야 하죠?

- 넌 선택을 하러 온 게 아니야. 선택은 이미 했지. 선택을 한 이유를 알아야 해.[각주:7]


달성 여부의 목적성을 지닌 스미스로서는 그런 네오를 이해하지 못한다. 이해하고 초월해야 할 대상(원형)인데, 이해하지 못한다. 스미스의 초조함은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보이는 것이다. 



- 잠깐! 이걸 본 적 있어. 이거야, 이게 끝이야! 그래, 넌 그렇게 누워있었어. 그리고 난...... 여기 서서, 이렇게 말하기로 돼 있지. 이렇게...... 시작이 있는 것엔 끝도 있다, 네오. ......뭐, 내가 방금 뭐라고 했지? 아냐, 이건 아냐. 말도 안 돼! ......다가오지 마!

- 뭘 두려워하나?

- 이건 함정이야!

- 네 말이 맞았어. 넌 늘 옳았지. 이건 필연이야.[각주:8]


여기서 스미스가 본 건 오라클의 예언이 아니다. 오라클은 그저 직관력이 있는 프로그램일 뿐, 직접적으로 미래를 본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매트릭스 2 : 리로디드』에서 트리니티가 떨어지는 꿈은 보이는데, 결과가 보이지 않느냐는 질문에 오라클은 이렇게 대답한다.



- 이해가 안 되는 선택 이후는 볼 수 없거든.[각주:9]


방금 전까지 죽음을 불사하고 싸울 것 같던 네오는 더 이상 싸우지 않는다. 순순히 패배를 받아드린다. 이미지가 원형을 살해하는 순간을, 스스로 받아드린다. 이해할 수 없는 선택. 오라클의 직관력을 지녔지만, 스미스는 네오의 선택을 이해하지 못한다. 앞으로 벌어질 일들을 완벽하게 파악하지 못한다. 그러나 자신의 목적은 확고하기 때문에, 네오의 몸에 손을 꽂는다.



네오는 순순히 자신의 선택을 받아드린다. 

스미스는 목적을 달성한다.


그러나 이 순간 실재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모든 것이 복제된 이미지, 단일한 시뮬라크르만 존재한다. 모두 복제에 불과하다. 스미스는 네오 보다 더 네오 같은 존재가 되었지만, 네오가 존재하지 않는 세계에서는 아무 의미도 없다. 존재의 의미를 상실한 스미스는 소멸하게 된다.




스미스는 '이건 불공평해. This isn't fair.'라고 신음한다. 네오는 홀로 존재할 수 있는데, 자신은 그럴 수 없음을 탄식하는 대사라고 할 수 있다. 순전히 자신의 착각인데, 영화를 보면 알겠지만 네오와 스미스는 항상 비슷하게 성장하고 힘을 키워왔다. 이 둘은 빛과 그림자와 같다. 어느 하나가 없으면 존재할 수 없다. 


'절대적 근원자는 없으며 오히려 절대적 다름만이 있다'




복제된 이미지로 가득 차서 존재하는 모든 것들이 아무 의미도 갖지 못하는 세계.


원형을 죽이고 스스로의 목적과 의미를 상실하게 되는 시뮬라크르.


이것이 영화 매트릭스의 결말이다.


  1. 네이버 두산백과 참조 [본문으로]
  2. 영화 『매트릭스 3』 中 [본문으로]
  3. 위와 같음 [본문으로]
  4. 위와 같음 [본문으로]
  5. 위와 같음 [본문으로]
  6. 위와 같음 [본문으로]
  7. 영화 『매트릭스 2』 中 [본문으로]
  8. 영화 『매트릭스 3』 中 [본문으로]
  9. 영화 『매트릭스 2』 中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