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구리네'에 해당되는 글 48건

  1. 2018.01.02 영화 『매트릭스』분석 : 3. 진실을 마주하고
  2. 2018.01.01 영화 『매트릭스』분석 : 2. 시뮬라시옹(Simulation)의 시작
  3. 2017.12.08 여성의 언어로 쓰여진 잡지 『우먼카인드 Womankind』
  4. 2017.12.07 화폐에 대한 진실, 그리고 비트코인 『비트코인이 금화가 된다』
  5. 2017.12.05 영화 『매트릭스』분석 : 1. 원형(原形)의 탄생
  6. 2017.12.04 영화 『매트릭스』분석 : 들어가며
  7. 2017.12.02 오리지널, 그리고 복제에 대해 『시뮬라시옹』
  8. 2017.12.01 맛있는 훗카이도 여행을 그리며 『행복의 맛, 삿포로의 키친』
  9. 2017.12.01 가치를 만들도록 도와주는 지도 『지적 대화를 위한 넓고 얕은 지식』
  10. 2017.11.08 논술 학원 선생하면서 학부모들에게 많이 들었던 질문 Q&A

영화 『매트릭스』분석 : 3. 진실을 마주하고

시뮬라크르란 결코 진실을 감추는 것이 아니다. 진실이야말로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숨긴다. 시뮬라크르는 참된 것이다.[각주:1] 영화의 배경이 되는 '매트릭스'는 참혹한 진실, 기계에 의해 인간이 건전지로 전락해버린 비참한 현실이다. '매트릭스'는 '과거 인간의 시대'의 시뮬라크르인 동시에 인간이 기계의 건전지로 사용되는 현실, 진실을 나타낸다.


우리가 그토록 궁금해하던 매트릭스의 진실은 『매트릭스 2 : 리로디드』의 후반부에서 설계자(Architect)와 네오의 대화를 통해 밝혀진다.



키메이커에게 소스로 들어가는 열쇠를 건네 받은 네오는 문을 열어 소스로 들어간다. 소스는 매트릭스의 근원이다. 네오는 그 안에서 설계자와 마주하고, 숨겨져있던 진실을 마주한다.



- 누구죠?

- 나는 설계자(아키텍트). 매트릭스의 창조자지. 자네를 기다렸네. 질문이 많군. 의식이 바뀌긴 했지만, 자네는 인간이야. 따라서 내 대답을 이해 못할 수도 있을 거야. 자네의 첫 질문은 적절하기는 해도, 가장 무의미한 질문이기도 하네.

- 내가 왜 여기 있죠?

- 자네의 삶은 매트릭스의 불균형한 방정식의 나머지의 합집합이야. 자넨 내가 수학적 정도의 조화인 매트릭스에서 없애지 못한 우발적 변종이지. 해결하진 못했지만, 예상이나 통제의 범위는 안 벗어났기 때문에 자네가 여기까지 오게 된 거지.

- 내 질문엔 답을 안 했소.

- 맞아. 흥미롭군. 자네가 가장 빨랐어.

- (모니터 속 네오가) 뭐라고? 또 있었어? 몇 명이나?

- 매트릭스는 오랫동안 존재했다. 난 하나의 완벽한 변종의 탄생을 기준으로 하는데, 이게 여섯 번 째 버전이지.

- (모니터 속 네오가) 5명이 더 있었다고? 거짓말! 개소리야!

- 둘 중 하나군요. 아무도 말해주지 않았거나. 아무도 몰랐거나.

- 그렇지. 자네의 추측대로 변종은 조직의 산물이야. 가장 단순한 방정식에서도 변이를 일으키지.

- (모니터 속 네오가) 날 통제하지는 못해! 없애버리겠어! 죽여버리겠어!

- 선택. 문제는 선택이군요.[각주:2]


둘의 대화에서 밝혀지는 사실을 하나 씩 확인해보자. 우선 이 대화를 통해서 매트릭스는 여러 버전이 존재했으며, 그 기준은 네오와 같은 변종의 탄생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여섯 번 째 버전이라는 건, 과거 다섯 명의 네오가 존재했었다는 뜻이다. 그리고 이 사실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모피어스를 비롯한 모든 인간들은 이 사실을 전혀 알지 못했다. 이 사실을 알았던 존재는 다섯 번 째 네오 뿐이었다.


'네오'라는 존재는 매트릭스 내에서 설계자가 미처 잡아내지 못한 오류의 집합체다. 우연의 극대화, 바로 그 자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설계자의 예상이나 통제를 완벽하게 벗어나지는 못했다. 이미 과거에 다섯 명의 네오가 바로 이 자리로 찾아왔었고, 현재에 이르러 여섯 번 째 네오가 같은 자리에 서 있는 것은 그 때문이다. 요원을 능가하는 신체 능력, 매트릭스 내의 규칙을 거부하는 능력, 총알을 멈추거나 하늘을 날아다니는 모습을 보고 네오가 통제에서 완전히 벗어났다고 믿었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았다는 뜻이다. 모두 설계자의 예상과 통제 속에 있었다.




- 최초의 매트릭스는 완전했지. 완벽하고, 탁월했어. 그런데 어이없이 실패하고 말았네. 실패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인간에게 내재한 불완전성 때문이었지. 다음엔 인간 역사를 근거로 인간의 괴팍한 면들을 더 정확히 반영했어. 그러나 그 역시 실패하고 말았지. 나는 나보다 낮은 지능이 필요하다는 결론에 도달했네. 적어도 완벽의 범위에 포함되지 않는 지능. 그래서 직관력이 있는 프로그램을 선택한 거야. 원래는 인간 정신의 단면들을 연구하려고 만들었지. 내가 매트릭스의 아버지라면, 그녀는 매트릭스의 어머니야.

- 오라클!

- 제발....... 그녀는 선택권만 주면 99%의 인간이 프로그램을 받아들인다는 사실을 알아냈지. 거의 무의식적인 수준에서 인식되는 선택권이라도 말이야. 효과는 있었지만, 근본적인 결함 때문에 내버려두면 시스템을 위협할 수도 있는 전혀 상반되는 변종이 생겨났지. 따라서 프로그램을 거부한 이들은 소수이기는 해도, 재앙의 불씨가 될 수 있다는 거야.

- 시온 말이군요.

- 네가 온 이유는 시온이 붕괴될 것이기 때문이다. 모든 살아있는 것들이 모조리 제거되지.

- 웃기는 소리. (모니터 속 네오도 함께)

- 가장 예측이 쉬운 반응이 부정이지. 하지만 잘 들어라. 우린 시온을 다섯 번이나 파괴했고, 그 일은 점점 쉬워지고 있다.[각주:3]


오라클은 두 번 째 매트릭스 실패 후, 설계자가 만들어낸 프로그램이다. 대화에서 네오가 그녀를 '오라클(Oracle)'이라 부르자 설계자는 미간을 찌푸리며 '제발(Please)'라고 말한다. 마치, 그녀를 그렇게 부르지 말라는 듯하다. 오라클의 뜻은 '신의 말을 전하는 자, 예언자'로 해석되는데, 이건 어디까지나 매트릭스에 있는 인간들의 시점일 뿐이다. 설계자 입장에서 그녀는 그저 프로그램에 지나지 않기 때문에, 네오가 그녀를 오라클이라 지칭하는 것에 난색을 표한다고 볼 수 있다.




- 너는 소스로 복귀해 네가 가진 코드를 전달하고 초기 프로그램을 입력한 후, 시온을 재건설할 여자 16명과 남자 7명을 매트릭스에서 뽑으면 된다. 이 과정을 따르지 않으면 시스템 충돌이 일어나 매트릭스의 모든 인간이 죽는다. 그럼 시온의 멸망과 함께 인류 전체가 종말을 맞게 되지.

- 그렇겐 못할 텐데. 인간은 당신 에너지원이니까.

- 우리에겐 여러 단계의 생존방법이 있다. 문제는 네가 인류의 멸망을 감당해낼 준비가 됐느냐는 거지. 반응이 아주 흥미롭군. 먼저의 다섯은 모두 비슷한 태도를 보였지. 본연의 임무에 충실해 동족에 대한 끝없는 애착을 나타냈거든. 모두 일반적으로 반응했는데 넌 훨씬 더 구체적이야. 사랑 때문인가.

- 트리니티!

- 네 목숨을 자기 것과 바꾸려고 매트릭스에 와 있지.

- 안 돼.

- 마침내 근본적인 결함이 궁극적으로 표출되고, 시작과 끝으로서의 변종이 발현되는 순간이 왔군.[각주:4]


매트릭스가 실패하면 설계자는 그 이유를 파악하기 위해 오류 코드를 확인하고 프로그램을 리셋시켰다. 동시에 발생한 오류들을 모두 삭제하는 작업을 진행했다. 바이러스나 오류가 발생하면 그 이유를 알아내기 위해 보고서를 요청하는 백신 프로그램과 같다. 보고서를 받은 백신은 같은 오류가 발생하지 않도록 조치를 취한다. 


오류 코드의 집합체가 바로 네오이며, 프로그램은 매트릭스다. 삭제시킬 오류들은 시온이 된다. 여태까지 다섯 명의 네오가 존재했고, 다섯 번 시온이 멸망했다. 



- 문이 두 개 있다. 오른쪽은 소스로 가서 시온을 구할 문이고, 왼쪽은 인류를 멸망시키면서 여자에게 갈 문이지. 네 말대로 선택의 문제다. 하지만 우린 이미 결과를 알고 있지 않나? 네 몸에선 벌써 화학반응이 일어나고 논리와 이성을 덮어버릴 감정이 싹트고 있지. 그 감정 때문에 아주 간단한 사실을 잊고 있어. 그 여자는 죽는다. 넌 절대 막을 수 없어.[각주:5]


다섯 번 시온이 멸망했다는 이야기는, 이전 다섯 명의 네오는 오른쪽 문으로 들어갔음을 의미한다. 그러나 네오는 트리니티를 구하기 위해 왼쪽 문을 선택한다. 이는 결과적으로 이전과 다른 네오를 만들어낸다. 첫 번째 분석문에서 절대적인 근원은 존재하지 않고, 절대적인 다름만이 존재한다는 것을 이야기한 적이 있다.


과거의 다섯 명과 다른 선택을 함으로서, 네오는 새로운 원형으로 탄생한다. 네오는 전혀 새로운 원형이 된다.



- 하! 희망은 인간 본연의 환상이지. 네 가장 강한 무기이자, 치명적인 약점이기도 하고.

- 다신 날 안 만나는 게 좋을 거요.

- 그럴 일 없네.[각주:6]


설계자는 네오에게 다시 만날 일이 없다고 답했지만, 이후 둘은 다시 만나게 된다. 결과적으로 설계자의 계산(예상이 아니다)이 틀렸다. 이는 네오가 비로소 설계자의 통제를 벗어났다는 뜻이다. 그리고 바로 이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설계자의 호언장담과는 달리 네오는 트리니티를 구해내는데 성공한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죽은 트리니티를 소생 시킨다. 이미 이 순간부터 네오가 설계자의 예상을 뛰어넘고, 통제에서 벗어났음을 알 수 있다.



- 이해할 수 없어. 모든 게 예언대로 됐는데....... '그'가 소스에 가면 전쟁은 끝나야 돼.

- 24시간 안에 끝나요.

- 뭐?

- 대책을 안 세우면 24시간 안에 시온이 멸망해요.

- 뭐?

- 어떻게 알지?

- 내가 들었어.

- 누구한테?

- 그건 중요하지 않아요. 중요한 건 내가 믿는다는 거예요.

- 아냐, 예언은.......

- 거짓이에요, 모피어스. 예언은 거짓이에요. 난 아무것도 끝내지 못해요. 모두 통제 시스템일 뿐이에요.

- 믿을 수 없어.

- 방금 말했잖아요. 예언대로 전쟁이 끝났나요? ......미안해요. 받아들이기 힘들겠지만, 분명한 사실이에요.

- 어떡하면 되지?

- 나도 몰라.[각주:7]


네오는 설계자에게 들었던 이야기를 전하지만, 다들 믿기 어려워 한다. 누구보다 오라클의 예언을 믿었던 모피어스는 끝내 그 사실을 부인하려 한다. 여기까지 우리가 알아낸 사실을 정리해보자.


1. 매트릭스는 과거 인간들의 세상을 본 떠 만든 통제 프로그램이다.

2. 수많은 오류가 매트릭스에서 발생했고, 그 집합체가 바로 네오다.

3. 네오의 출현으로 매트릭스의 버전이 나뉘는데, 영화가 진행되는 시점은 여섯 번 째 버전의 매트릭스다.

4. 인류의 멸망은 네오에게 달려있는 문제다.

5. 앞서 다섯 명의 네오는 인류를 구하는 선택을 했다.

6. 이로 인해 시온은 이미 다섯 번이나 멸망했었다.

7. 이 사실을 알고 있는 인간은 아무도 없었다. 혹은 네오만이 알고 있었으나 누구에게도 발설하지 않았다.

8. 현재의 네오는 트리니티를 구하는, 앞선 이들과는 다른 선택을 한다.

9. 결과적으로 네오는 설계자의 예상과 통제를 벗어난, 새로운 원형으로 탄생한다.



네오는 자신에게 일어난 변화를 느낀다. 처음 마주하는 상황에서도 폭탄이 날아오는 것을 감지하고, 기계(센티넬)를 느낄 수 있게 됐다. 뿐만 아니라 손짓만으로 기계를 파괴하기까지 한다. 마치 매트릭스 내부에 간섭하는 것과 같은 초능력을 보인다. 이는 네오가 설계자의 통제에서 벗어나기 시작했으며, 보다 더 깊은 곳까지 프로그램에 간섭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진실을 감추기 위한 껍질을 벗겨내고, 감춰졌던 사실을 마주한 네오는 한 층 더 또렷하게 원형의 모습을 띄게 된다.






  1. 『시뮬라시옹』, 장 보드리야르, 민음사, P. 5 [본문으로]
  2. 영화 『매트릭스 2』 中 [본문으로]
  3. 위와 같음 [본문으로]
  4. 위와 같음 [본문으로]
  5. 위와 같음 [본문으로]
  6. 위와 같음 [본문으로]
  7. 위와 같음 [본문으로]

영화 『매트릭스』분석 : 2. 시뮬라시옹(Simulation)의 시작

시뮬라시옹 Simulation은 원형을 복제하는 현상 자체라고 할 수 있다. 그렇게 만들어진 복제를 '시뮬라크르 Simulacre'라고 한다. 영화에서 참고한 내용은 장 보드리야르의 『시뮬라시옹』이지만, 사실 시뮬라크르는 훨씬 오래 전에 제시되었던 철학 개념이다. 그 기원은 고대 그리스까지 올라간다.


시뮬라크르는 원래 플라톤에 의해 정의된 개념이다. 플라톤에 의하면, 사람이 살고 있는 이 세계는 원형인 이데아, 복제물인 현실, 복제의 복제물인 시뮬라크르로 이루어져 있다. 여기서 현실은 인간의 삶 자체가 복제물이고, 시뮬라크르는 복제물을 다시 복제한 것을 말한다. 

그러나 엄밀한 의미에서 완전한 복제란 있을 수 없다. 사진을 찍을 때, 모델의 겉모습은 사진에 그대로 나타나지만 사진을 찍는 바로 그 순간의 모델의 진짜 모습을 담은 것은 아니다. 사진을 찍는 사건이 일어나는 순간적인 시점에 모델의 마음 속을 스쳐 지나간 수많은 생각·느낌까지 사진에 담을 수는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복제되면 복제될수록 진짜와는 점점 거리가 멀어진다. 이 때문에 플라톤은 시뮬라크르를 한 순간도 자기 동일로 있을 수 없는 존재, 곧 지금 여기에 실재()하지 않는 것이라 하여 전혀 가치가 없는 것으로 보았다. 시뮬라크르를 정의할 때, 최초의 한 모델에서 시작된 복제가 자꾸 거듭되어 나중에는 최초의 모델과 구분할 수 없을 정도로 뒤바뀐 복사물을 의미하게 된 것도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그러나 들뢰즈는 역사적인 큰 사건이 아니라 우주에서 일어나는 모든 사건, 즉 순간적이고 지속성과 자기 동일성이 없으면서도 인간의 삶에 변화와 의미를 줄 수 있는 각각의 사건을 시뮬라크로로 규정하고, 여기에 커다란 가치를 부여하였다. 들뢰즈는 이를 '사건의 존재론'으로 설명하는데, 그가 말한 시뮬라크르는 위의 시뮬라크르 개념과 다르다.

들뢰즈가 생각하는 시뮬라크르는 단순한 복제의 복제물이 아니라, 이전의 모델이나 모델을 복제한 복제물과는 전혀 다른 독립성을 가지고 있다. 이는 모델의 진짜 모습을 복제하려 하지만, 복제하면 할수록 모델의 모습에서 멀어지는 단순한 복제물과는 다르다는 것을 의미한다. 들뢰즈의 시뮬라크르는 모델과 같아지려는 것이 아니라, 모델을 뛰어넘어 새로운 자신의 공간을 창조해 가는 역동성과 자기정체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단순한 흉내나 가짜(복제물)와는 확연히 구분된다.[각주:1]


장 보드리야르는 시뮬라시옹&시뮬라크르를 현대적으로 해석했지만, 들뢰즈가 말한 '모델과 같아지려는 것이 아니라, 모델을 뛰어넘어 새로운 자신의 공간을 창조해 가는 역동성과 자기 정체성을 가지고 있다'는 성질은 여전히 지니고 있다.


워쇼스키 형제(남매)는 영화에서 그 성질을 보여주기 위해 '스미스'라는 인물을 설정했다. 네오가 원형이라면, 스미스는 시뮬라시옹이자 시뮬라크르다.




- 네오를 찾고 있다.

- 그런 사람 몰라.

- 전해줄 게 있어. 선물이지. 내게 자유를 줬거든.

- 알았으니까 꺼져![각주:2]



- 누구였지?

- 어떻게 알았어요?

- 이걸 줬어요. 당신이 자유를 줬다고 했어요.[각주:3]



인이어는 요원들이 항상 귀에 꽂고 다니는 물건이며, 통제를 상징한다. 요원은 인이어를 통해 매트릭스 시스템의 통제를 받는다. 스미스가 인이어를 뺐다는 건, 더 이상 시스템의 통제를 받지 않음을 의미한다. 시스템의 통제에서 벗어난 존재라는 점에서 스미스는 네오와 동일한 존재라고 할 수 있다. 



스미스가 네오와 두드러지게 다른 것은 스스로를 복제한다는 사실이다. 스미스는 끊임 없이 스스로를 복제한다. 동일 개체의 재생산이다. 동일 개체는 아니지만, 우리는 이미 재생산을 보았다. 전편에서 네오가 스미스 속으로 들어가 매트릭스 내에 존재하는 자신의 신체를 새롭게 만들어내는 모습을, 우리는 기억하고 있다.


네오와 스미스 모두 자기 스스로를 다시금 만들어내는 재생산을 보여줬지만, 명백한 차이가 존재한다.


네오는 스미스의 안에서부터 완전히 다른 모습으로 탄생한다. 밝은 빛을 발하며 알처럼 껍질(스미스)을 쪼개고 밖으로 나온다. 반대로, 위 사진에서 볼 수 있듯 스미스의 재생산은 검은 액체가 대상의 몸을 뒤덮으면서 일어난다. 외부에서부터 시작되는 재생산이다. 이는 눈에 보이는 형체를 따라하는 것에 불과하다. 네오는 안에서부터 밖으로 자기 자신을 형성시키고 표출하는 재생산이고, 스미스는 밖에서부터 자기 자신을 덮어씌우는 재생산이라는 점, 그리고 계속해서 자신을 복제한다는 점에서 둘의 재생산은 차이를 보인다.


결과적으로 네오는 재생산을 통해 완전히 새로운 존재(원형)로 탄생하지만, 스미스는 개체 수를 늘리기만 한다. 그 모습은 암세포와 같다. 이 표현은 이후에도 영화에서 스미스를 묘사할 때 쓰인다.





시온에서 모피어스의 연설이 끝난 후, 사람들은 광란의 파티를 벌인다. 그 모습은 성적으로 묘사될 뿐만 아니라, 네오와 트리니티의 섹스를 직접적으로 보여주기도 한다. 섹스는 인간의 번식을 위한 행위이기만, 굉장히 비효율적인 생산 방식이다. 두 사람의 유전자 결합에서 열성(劣性)이 태어나지 않으리란 보장은 어디에도 없다. 그렇지만 동일개체의 동일 증식, 그러니까 스미스처럼 자기 스스로를 계속해서 늘려가는 것에는 어떠한 위험도 지니지 않는다. 열성은 배제하고 우성(優性)이 보장되는 번식(재생산) 방법이다.


공장을 떠올려보자. 수많은 사람이 바느질을 하는 것과 정밀한 기계가 바느질을 하는 것의 차이다. 사람의 바느질은 제각각이며 이따금 실수도 일어날 수 있다. 기계의 바느질은 일정하며 실수를 최소화한다. 이와 같이 효율성을 따졌을 때, 섹스는 비효율적인 생산 방식이다. 


암은 전체적인 유기적 법칙을 고려하지 않고, 기본세포의 무한번식을 지시한다. 동일 증식도 마찬가지이다. 아무것도 더 이상 동일한 것의 연장에, 하나의 유일 모체의 제지 없는 번식에 대항하지 않는다. 전에는 성적인 재생산이 한 유일 모체의 무한 재생산에 대항하였지만, 오늘날은 거꾸로 동일성의 생식 모체를 마침내 분리할 수 있게 되어 개인들의 우연적인 매력을 만들어주었던 차별적인 모든 우연적인 사건들을 제거할 수 있을 것이다.[각주:4]


그렇지만 가장 인간적인 생산 방식이다. 우리는 유전자의 결합, 혹은 충돌로 인해 발생하는 우연으로 보다 나은 존재가 될 수 있다. 반대로 결함이 있는 존재가 될 가능성도 있지만, 항상 같은 존재로 남아있지는 않는다. 원형과 복제의 탄생, 재생산, 발전은 여기서 차이를 보인다.


 

 탄생

 재생산

 발전

 표현

 원형

 내부에서 발현

 가능성에 기댄 우연

 우연의 극대화

 네오, 인간, 현실

 복제

 외부에서 발현

 위험(우연)을 배제한 복제

 발생하는 위험(우연) 제거

 스미스, 기계, 매트릭스


이와 같은 성질을 통해 우리는 영화 내에 존재하는 원형과 복제(시뮬라크르)를 구분할 수 있다. 이 성질을 인지하고 진행하다 보면 영화 내에서도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 어떻게 된 건지는 모르겠어. 네 일부가 내게 덮어씌워졌거나 복사된 건지... 물론, 상관없지. 중요한 건 모든 일엔 이유가 있다는 거야.

- 그 이유가 뭘까?

- 넌 분명히 내 손에 죽었다. 그땐 참 만족스러웠지. 그런데 불가능할 것 같은 일이 일어나버렸어. 네가 날 파괴한 거야. 그 후 규정에 따라 내가 뭘 해야 하는지 알았지만, 따르지 않았어. 규정을 어겨서라도 여기 남아야만 했거든. 네 덕에 여기 있게 된 거야. 더 이상 요원도 아니지. 연결도 끊고 일종의 새사람이 된 거야. 너처럼 자유로워졌지.

- 축하해주지.

- 고맙군. 그러나 외형은 속임수고 우리의 존재 이유는 따로 있다. 우리가 여기 있는 건, 실은 자유롭지 못해서야. 이유나 목적은 부정할 수가 없지. 우리는 목적 없이는 존재할 수 없으니까. 목적이 우리를 창조했고, 우리를 연결하고, 우리를 끌어주고, 인도하고, 조종한다. 목적이 우리를 정의하고, 결속시킨다. 우린 너 때문에 존재해. 네가 우리에게 뺏으려던 걸 우리가 뺏기 위해![각주:5]



전에 언급했듯 이미지(복제)는 자기 자신의 모델(실재)을 죽이는 살상력을 가진다. 사과 그림을 그리기 위해 놓여진 사과는 그림이 완성되면 사라지게 된다. 들뢰즈는 시뮬라크르가 복제이면서 실재인 모델을 뛰어넘어, 역동성과 자기정체성을 지닌다고 했다. 스미스가 딱 그 모습이라고 할 수 있다.


전편부터 스미스는 통제에서 벗어나고 싶어했다. 다른 요원들과 달리 임무와는 상관 없는, '매트릭스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자기정체성을 지니고 있었다. 이 자기정체성은 위 대화(우리가 여기 있는 건, 실은 자유롭지 못해서야)에서도 여실히 드러난다. 여기에 새로운 목적, 욕구, 자기정체성이 정립되는데, 바로 네오의 죽음이다. 


네오의 죽음은 단순히 생명의 끝이 아니라, 스미스 스스로가 원형이 되고자 하는 시뮬라크르의 완성을 의미한다. 그러나 스미스는 네오를 죽이는데(복제하는데) 실패한다. 원형을 죽이는 살상력이 부족한 복제는 어떻게 할까?



더 많은 복제를 한다.



계속되는 복제를 통해서 스미스는 프로그래머들이 사용하는 뒷문까지 들어오게 된다. 이는 뒷문을 사용하는 존재를 덮어썼기(복제) 때문에 얻은 능력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이처럼 스미스는 복제를 통해 스스로를 재생산하면서 네오를 죽일 살상력을 키워나간다. 


이 과정을 우리는 시뮬라시옹으로 볼 수 있다.




  1. 네이버 두산백과 참조 [본문으로]
  2. 영화 『매트릭스 2』 中 [본문으로]
  3. 위와 같음 [본문으로]
  4. 『시뮬라시옹』, 장 보드리야르, 민음사, P. 174, 175 [본문으로]
  5. 영화 『매트릭스 2』 中 [본문으로]

여성의 언어로 쓰여진 잡지 『우먼카인드 Womankind』



서점에 가면 잡지 코너는 항상 들리기 때문에 대부분의 월간지는 눈에 익다. 내용을 안 봤어도 이름은 알고 있는 잡지가 대부분이다. 그 중에 처음 보는 녀석이 있어서 집어왔다. 여성의 언어로 세상을 말한다는 잡지 『우먼카인드 Womankind』다. 2014년 호주에서 창간되었으며, 2017년 11월에 한국 창간호가 출판됐다.


근래 페미니즘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는 게, 이 잡지의 창간에 한 몫했으리라 짐작한다.





『우먼카인드 Womankind』는 문화, 철학, 역사, 심리학 등에서 논의되는 여성들의 삶에 대한 내용을 다룬다.


포괄적이지만 집중적이고 담백하다. 일러스트나 사진은 황홀할 정도로 아름답다. 훌륭한 사진집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눈에 대한 즐거움은 확실하게 충족시켜주는 잡지다. 실려있는 글도 읽는 재미가 쏠쏠하다. 사실, 이렇게 맛있는 글을 잡지에서 찾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확실히 단언컨데, 이 잡지에 기고하는 여성들의 글은 맛이 있다.





에스테스의 야성 치료는 늑대 연구에서 비롯되었다. 에스테스가 보기에 늑대는 여성과 공통점이 많았다.

"둘 다 불손하고... 천성적으로 위험하고 탐욕스럽다는 오해를 받아왔다."

옛이야기 속 늑대는 절대 믿어서는 안 될 무자비하고 음흉한 악당이다. 여성들 역시 주로 사악한 마녀나 심술궃은 계모, 아둔한 매춘부 따위로 그려졌다. 하지만 현실은 꽤 다르다.

"건강한 늑대와 여성은 예민한 감각, 명랑한 영혼, 강인한 희생정신 등 정신적으로 많은 공통점을 갖고 있다. 심오한 직감을 지녔고, 혈육, 짝, 무리를 끔찍이 아낀다는 점도 서로 닮았다."

그러나 수천 년 동안 늑대와 여성은 핍박과 공격에 시달려야 했다.





잡지를 읽으면서 담백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는데, 이제 보니 광고가 하나 없다.


『우먼카인드 Womankind』는 광고 없이 발행되는 잡지다. 놀라울 따름이다. 다른 잡지를 비롯한 간행물들이 얼마나 많은 광고로 운영되고 있는 지 생각하면 말이다. 이들은 순전히 잡지 내용에 충실하여 분량을 채운다. 이것만 봐도 이 잡지를 읽어볼 가치가 있다. 남들이 하지 않는 일을 할 때는, 분명 색다른 것이 존재한다는 뜻이다.





여성을 위한 잡지라고 하지는 않겠다.


애초에 인간은 두 개의 성을 모두 아우르는 말이고, 우리는 서로를 안고 가야할 운명을 타고 났다. 오히려 남성들에게 이 책을 더 권하고 싶다. 얼빠지고 터무니없는 여성 인권을 외치며 잘못된 페미니즘에 진절머리가 난 남성이라면 더더욱, 이 잡지를 읽어보시길. 『우먼카인드 Womankind』는 페미니즘에 대해 언급하지 않지만, 스스로 여성의 인권을 드높이는 모습을 보여주는 잡지다.


진짜 페미니즘이 뭔지 알고 싶은 사람, 혹은 왜곡된 페미니즘에 지친 사람에게 추천한다.






화폐에 대한 진실, 그리고 비트코인 『비트코인이 금화가 된다』




언제부터인가 비트코인이라는 단어를 쉬이 접할 수 있게 되었다. 당최 이게 뭐에 쓰는 물건인가 몰랐는데, 미처 알아차리기도 전에 그 존재감을 드러냈다. 미친 듯한 가격 폭등으로 1비트코인이 1,000만원을 넘어섰다. 비트코인에 투자하는 사람들이 몰리면서, 지금도 상승세가 멈출 기세를 보이지 않는다. 이에 따라 비트코인 뿐만 아니라 다양한 종류의 코인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다양하게 늘어선 코인들 중에 어떤 것에 투자를 해야 할 지 눈치를 보고 있는 상황이다.


내가 이 책을 산 이유는 대체 비트코인이 무엇인지 알아보기 위해서였다.


비트코인이라고 하는 게 무엇이길래 사람들이 이렇게 몰리는 것일까. 그 궁금증을 해결하기 위해 서점에서 이 책을 집어왔다. 그렇지만 책을 다 읽은 후에도 나는 아직 비트코인을 완전히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우선 책을 통해 내가 알아낸 사실을 추려보면 이렇다.


1. 비트코인은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전자화폐다.

2. 전자화폐는 해킹과 복제에 취약한 단점을 가지고 있다.

3. 단점을 극복하기 위해 '블록체인 Block Chain' 기술이 등장한다.

4. 블록체인은 '분산 장부 시스템'을 기초로 하고 있다.

5. 장부의 내용, 내역을 연결되어 있는 네트워크에 일괄적으로 기록한다. 이렇게 되면 하나의 특정 장부를 해킹했다 가정해도, 다른 장부의 내용과 불일치하기 때문에 사용을 불가하게 할 수 있다. 그렇다면 동시다발적으로 모든 연결된 모든 장부를 해킹해야 하는데, 그런 연산을 불가능하다.

6. 5와 같은 이유로 비트코인은 전자화폐이면서도 안전을 보증한다.

7. 5와 같은 이유로 비트코인을 '암호화폐 Cryptocurrency'라 부른다.

8. 비트코인은 은행 같은 중간 거래소를 통하지 않고 거래가 가능하기 때문에 수수료가 지극히 적다.

9. 아프리카와 같이 은행이 많이 설립되지 않은 국가에서 특히 장점이 두드러진다.

10. 미국, 영국을 비롯한 여러 유럽 국가에서는 시중에서 이미 비트코인을 사용 중이다.

11. 스위스에는 비트코인을 현금화 시켜주는 ATM도 존재한다.


책은 비트코인에 대해 이야기하기 전에 '화폐란 무엇인가'에 대한 답을 구하고 있다. 책에서 말하는 화폐란 특정 집단, 국가, 정부에 의해서 조작될 수 있는 불안정한 가치다. 그리고 그 말은 틀리지 않다. 화폐란 인간들이 사회를 구축하고 서로 약속하기 위해 만들어낸 가상의 가치에 지나지 않는다. 책은 우리가 깊게 생각하지 못했던, 미처 알지 못했던 화폐의 허상을 낯낯이 파헤친다. 이를 비트코인과 비교하며 상대적으로 비트코인의 월등함을 말하고 있다.


거의 찬양하는 수준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저자의 생각에는 일부 동의한다.


암호화폐는 전망이 좋고, 앞으로 꾸준히 개발되어 많은 이들에게 사용될 여지가 있다. 그러나 개인적으로는 비트코인에 대해 너무 긍정적인 내용만 있지 않나, 싶다. 저자는 책에서 비트코인을 금화, 금과 비교한다. 금은 제한되어 있는 재화이기 때문에 정부나 국가가 멋대로 가치를 조정할 수 없다. 때문에 금은 가치를 가장 확실하게 보존하는 방법이라고 할 수 있다. 저자는 비트코인도 금과 같다고 말한다.


실제로 비트코인은 2040년까지 2,100만의 수량만 채굴된다.


내가 제일 궁금했던 건, 대체 '어디서부터 비트코인이 등장했느냐'였다.


2008년 10월 31일 저녁 '비트코인 : P2P 전자 화폐 시스템'이라는 논문이 암호화 기술 커뮤니티 메인(Gmane)에 등재됐다. 그리고 2009년 1월 3일. 논문으로만 존재하던 비트코인이 구현되었다. 비트코인은 채굴 시간이 기록되는 기술, 타임 스탬프가 있다. 제 1호 비트코인에는 2009년 1월 3일 오후 6시 15분 5초라는 시간이 찍혀있다. 이 사람이 바로 비트코인의 아버지라 불리는 '사토시 나카모토'다.


그러나 아무도 '사토시 나카모토'의 정체를 알지 못한다.


비트코인의 기술을 유지, 보수하던 개발자들과의 접촉은 있었지만 실제로 만난 건 아니었다. 그는 자신의 정체를 밝히지 않고 2011년에 잠적해버린다. 때문에 아직까지도 그의 정체를 아는 이가 아무도 없다. 즉, 비트코인을 만든 사람은 존재하는 동시에 존재하지 않는다.


혹자는 사토시 나카모토의 잠적은 어디에도 통제 받지 않는 화폐 가치를 만들기 위해서라고 해석하지만, 미심쩍은 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이래서야 2,100만의 수량이 진짜인지, 과연 비트코인이라는 암호화폐가 안전한 것인지 확신할 수 없다. 개발자가 나타나 전부 백지화시켜버릴 지도 모르는 일이니까.


기술적으로 접근했을 때, 블록체인은 훌륭한 기술이라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비트코인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은 회의적이다. 특히 우리나라 경우에는 말이다.


비트코인은 인터넷에서 지갑을 만들기만 하면 누구나 접할 수 있다. 남녀노소. 헌데 그 가치가 폭등하고 있다. 알지도 못하는 사람들이 돈이 된다는 말에 혹해서 너도나도 비트코인을 해야 한다며 떠들고 있다. 그 실체도 파악하지 못한 채 말이다. 불나방이 따로 없다. 비트코인의 미래가 어떻게 될 지는 아무도 알 수 없다. 지금과 같은 폭등 현상이 이를 증명해주고 있다. 불안정한 시기이기 때문에 가격 변동이 심하다. 누군가는 크게 벌었지만, 누군가는 크게 잃었다. High Risk High Return. 이 사실을 알고도 뛰어든다면 상관이 없다. 모르고 뛰어들었다가 불에 몸을 태우는 일이 없기를.


투자 / 제태크 분야에서 이 책을 찾을 수 있지만, 실상 비트코인 투자법에 대한 설명은 없다. 화폐의 실상과, 비트코인에 대한 긍정적인 면을 보여주고 있는 책이다. 책을 읽다보면 암호화폐가 훌륭한 발상의 전환으로 만들어진 기술이라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필요한 건, 가치를 쫓는 게 아니다. 발상을 전환하여 새로운 가치를 만들어내는 것이 필요하다.


허황된 미래보다 새로운 미래를 바라는 이들에게 추천한다.

영화 『매트릭스』분석 : 1. 원형(原形)의 탄생

원형. Original. 복제, 모방을 낳게 하는 최초의 작품. 


우리는 '최초'라는 단어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최초'라 함은 '첫번째'라는 순서를 나타낸다. 그러나 『시뮬라시옹』은 순환논리에 따른 순서나 질서의 의미는 완전한 허구에 불과하다. 


첫번째는 두번째가 있기 때문에 첫번째가 된다, 즉 두번째 없는 첫번째는 있을 수가 없으며, 첫번째로 존재할 수가 없다. 그렇다면 첫번째는 첫번째가 되기 위하여 두번째를 미리 상정하여야만 한다. 따라서 첫번째는 두번째 이후에 첫번째가 된다. 결국 첫번째는 두번째 이후에 존재하게 되므로 세번째가 된다. 이와 같이 하게 되면 순서나 질서의 의미는 완전한 허구임이 드러나고, 어떤 하나는 자신 속에 자신을 부정하는 반대 명제를 이미 가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각주:1] 


두번째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첫번째를 상정할 수 없다. 2등을 할 사람이 있어야만 1등을 지정할 수 있다. 때문에 사실상 1등은 2등이 정해져야 만들어지는 존재이므로 세번째에 만들어진다. 그렇다면 근원은 2등인가, 하면 또 아니다. 2등 역시 1등 없이는 존재하지 못한다. 따라서 순환논리는 완전한 허구에 불과하다. 


근원이란 1이면서 2를 내포하고 있어야 한다. 위에서 말했 듯 '어떤 하나는 자신 속에 자신을 부정하는 반대 명제를 이미 가지고 있음'이다. 절대적이고 유일한 근원은 존재하지 않으며, 언제나 자신과 다름을 내포한 근원이 존재한다. 책에서는 '절대적 근원자는 없고 오히려 절대적 다름만이 있다'[각주:2]라고 말하고 있다.



영화에서 등장하는 가장 순수한 원형은 기계들이 지배하고 있는 '현실'이다. 그리고 이 근원을 부정하는 세계가 바로 가상 세계인 '매트릭스'다. '매트릭스'는 어디에서 왔는가. 바로 '현실'이다. 완벽하게 인간의 의식을 통제하는 이 시스템은 지독하리만큼 똑같은 '현실'을 기반으로 세워진 가상 세계다. 가상이 실제를 삼켜버린, 완벽한 시뮬라크르[각주:3]다. 


이미지에 걸린 문제는 항상 자기자신의 모델인 실재를 죽이는 이미지의 살상력일 것이다.[각주:4] 미술학원에서 실습 때 그리는 사과 따위를 생각해보라. 학생들은 사과의 모습을 따라 이미지를 만들어 낸다. 문제는 그 이후인데, 이미지가 완성된 다음에 더 이상 필요 없어진 사과는 버려지게 된다. 그렇다 하더라도 사과의 이미지는 그대로 보존된다. '현실'이 파괴되었다 해도 그 이미지로서 '매트릭스'는 존재할 수 있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아니, 오히려 '현실'이 파괴됨으로 인해서 '매트릭스'가 존재하게 되었다고 해도 좋다.



- 진짜가 아닌가요?

- 진짜가 뭔데? 어떻게 정의를 내리지? 촉각이나 후각, 미각, 시각을 말하는 거라면 '진짜'란 두뇌가 해석하는 전자 신호에 불과해.[각주:5]


처음으로 현실을 마주하게 된 네오는 자신이 여태까지 현실이라고 믿었던 세계가 전부 만들어진 가상이라는 사실을 받아드리지 못한다. 자신이 만지고 마시고 맛보고 본 모든 것들이 '진짜'가 아니다. 모피어스의 말대로 그러한 감각은 뇌에서 해석하는 신호에 불과하다. 눈을 가리고 음료를 마시면 다른 맛을 느끼는 것처럼, 우리의 뇌나 감각은 생각보다 속이기 쉬운 존재다. 영화처럼 고도의 지식을 가진 기계들은 그 허점을 이용해 '매트릭스'를 만든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진짜'는 '원형'에 가깝다.


우리 대부분은 뇌의 해석을 의심하지 않으며, 있는 그대로를 받아드린다. 누구도 앞에 놓인 것에 대해 의혹을 제기하지 않는다. 액체를 담아서 마실 수 있는 물체가 있다면, 모두가 그 물체를 컵으로 받아드리는데 큰 어려움을 느끼지 않을 것이다. 만약 누군가 그 물체에 물을 따라 마시는 걸 본다면, 이후에 그 것을 컵이라 인식하는 건 어렵지 않을 거다. 그렇다면 그 물체가 과연 컵의 '원형'이라고 할 수 있는가, 하면 그렇지는 않다. 


'액체를 담아서 마실 수 있는 물체'란 '컵'을 규정하는 하나의 의미다. 컵의 모양은 기호에 따라 결정된다. 손잡이가 있는 것, 없는 것. 주둥이가 큰 것, 작은 것. 기호는 의미보다 더 다양하고, 넓은 범주를 지닌다. 이에 따라 전혀 컵처럼 보이지 않는 물체도 의미만 맞는다면 컵으로 존재할 수 있다. '의미'라는 실제를 통해 '기호'라는 복제품이 존재하게 되는 것으로 본다면, 이 역시 하나의 시뮬라크르라고 할 수 있다.


모피어스가 말하는 '진짜'란 이 가상의 물체가 만들어질 수 있도록 해준 '원형', '근원'이다. 기호가 아니라 의미를 가리키고 있다. 모피어스는 영화에서 현실과 가상을 명확하게 구분하는 존재로, 일종의 경계선을 나타내는 역할을 하고 있다. 그런 모피어스가 네오를 '그'라고 믿는다.



- 매트릭스가 건설 될 때 안에서 태어난 자가 있었지. 그는 원하는 바를 바꿀 수 있는 능력이 있었어. 매트릭스를 보기에 합당하게 바꿀 수 있었지. 그가 최초로 우리를 풀어주고 진실을 가르쳤지. 매트릭스가 존재하는 한, 인류는 자유를 얻지 못해. 그가 죽은 후, 오라클은 그의 재림을 예언했지. 그가 매트릭스를 파멸시키고 전쟁을 종식 시킴으로써 인류를 구원할 거라고. 그래서 우린 평생동안 매트릭스에서 그를 찾았지. 그를 찾았다고 믿었기에 내 할 일을 한 거야.[각주:6]


모피어스는 네오가 예언에 나오는 '그'의 재림이라 믿고 있다. 때문에 위험을 무릅쓰고 네오를 매트릭스에서 꺼내왔고, 이후에 오라클에게 데려가게 된다. 그러나 오라클을 만난 네오는 모피어스의 믿음과는 전혀 다른 말을 듣게 된다.



- 좋아. 이제 내가 '흥미롭군. 하지만......'이라고 말해야겠지. 그럼 자네가 할 말은......

- '하지만 뭐요'?

- 하지만 자네는 이미 내가 할 말을 알고 있어.

- 전 '그'가 아니군요.

- 미안하다. 넌 재능이 있지만, 뭔가를 기다리고 있는 것 같아.


오라클은 마치 이런 상황을 몇 번이나 겪은 것처럼 행동하며, 네오에게 '그'가 아니라는 이야기를 전한다. 네오는 오라클에게 답을 듣기 전에, 이미 자신은 '그'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이 순간에서 네오는 '그'(원형)가 아니다. 이후의 사건들을 통해서 네오는 '그'(원형)로 만들어지게 된다.



- 모피어스는 널 믿어, 네오. 너도, 나도, 그 누구도 모피어스를 설득할 수는 없어. 널 구하기 위해서라면 목숨을 버릴 정도로 그는 눈이 멀었어. 

- 네?

- 넌 선택을 해야 해. 모피어스의 목숨과 네 목숨 중에서 말이야.[각주:7]


동료였던 사이퍼가 이들을 배신하고 요원에게 팔아넘기면서, 모피어스가 요원들에게 끌려가게 된다.


오라클의 말대로, 네오는 다시금 선택의 기로에 놓인다. 자신과 모피어스의 목숨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상황. 네오는 트리니티와 함께 모피어스를 구하기로 마음 먹는다. 자신의 목숨을 포기하고 모피어스를 살리기로 선택한 것이다. 네오는 자신이 '그'라고 생각하지 않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에게 목숨을 건 모피어스를 위해 기꺼이 자신의 목숨을 건다.



- 네오, 이런 일은 아무도 시도한 적 없어.

- 그래서 성공할 거야.[각주:8]


여기서 트리니티의 대사가 중요하다. '아무도 시도한 적 없는 일'은 이전에 존재하지 않았던 일을 말한다. 이게 원형이 된다. 어떤 것을 모방하거나 영향을 받지 않고, 다름으로서 존재하는 행동. 이런 일을 하기 시작하면서 네오는 '그'(원형)가 되어간다.



- 난 여기서 벗어나야 해. 네 머리 속에 내가 나갈 열쇠가 있어. 내 열쇠가... 시온만 파괴되면, 난 여기 있을 필요가 없어. 코드가 필요해. 시온으로 들어가야 해. [각주:9]


네오가 원형으로서 그 구색을 갖추고 있다면, 반대의 스미스는 어떤가.


스미스는 매트릭스의 요원으로서 통제 프로그램이다. 가상 세계에서 벌어지는 이상 현상을 제어하고 통제하는 임무를 수행하는, 컴퓨터로 말하자면 백신 프로그램이라 할 수 있다. 스미스는 자신이 속해있는 매트릭스를 벗어나고자 한다. 그러면서 파괴하기 위해 '시온'으로 가야한다고 말한다.


'시온'은 '매트릭스'와 대비되는 현실 세계, 원형의 성질을 띄고 있다. 앞서 말했던 이미지의 문제점을 떠올려보자. 이미지는 자신의 모델인 실재를 죽이는 살상력을 가진다. 스미스는 '시온'(원형)을 파괴하려는 이미지(복제)인 셈이다. 다른 요원들은 스미스와 같이 '시온'에 광적으로 집착하지 않는다. 그들은 프로그래밍 된 대로 매트릭스의 시스템을 통제할 뿐이다. 이런 점에서 스미스는 다른 요원들과 확실히 차별되는 존재라 할 수 있다.



요원들이 말도 안 되는 속도로 움직이거나, 강력한 힘을 발휘하는 것은 실제로 이들이 빠르거나 강한 게 아니다. 매트릭스의 제약을 회피하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반대로, 더욱 철저하게 매트릭스의 통제를 받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요원들은 매트릭스에서 제한한 수준으로 행동할 수 있을 뿐이다. 이들은 철저하게 자신들에게 걸려있는 제한 내에서만 활동한다.


즉, 요원들은 빠르거나 강한 게 아니라 '총알을 피할 수 있을 정도의 스피드를 낼 수 있다'는 제약을 받고 있다고 생각하면 된다.



반면, 네오에게는 그런 제약이 없다. 매트릭스의 통제 안에 있으나, 그 통제를 벗어날 수 있다. 네오는 요원과의 전투에서 총알을 피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네오가 계속해서 '그'(원형)로 진화하고 있는 모습이다.


네오는 모피어스를 무사히 구출하는데 성공한다. 트리니티와 모피어스를 모두 현실로 피신 시키고, 자신이 빠져나가려는 순간 스미스와 대치하게 된다. 도망칠 수 있는 길이 있지만 네오는 맞서 싸우는 선택을 한다. 



- 네가 죽어가는 걸 즐겁게 지켜보지, 미스터 앤더슨.[각주:10]


전투 중에서 스미스는 네오를 '앤더슨'이라고 부른다. '앤더슨'은 네오가 매트릭스 안에서 불린 이름이다. 정리하면 아래와 같다.


앤더슨 = 매트릭스 안에서의 본명 / 네오 = 매트릭스 안에서의 가명


자신이 진짜라고 생각했던 세계. 그곳에서 가졌던 진짜 이름. 모피어스를 만나면서 이 모든 것들이 전복된다. '진짜라고 믿었던 세계'와 '진짜 이름'은 더 이상 진짜가 아닌 것이 된다. 네오는 스미스와의 전투에서 자신이 직면한 진실을 받아들인다.



- 내 이름은...... 네오다![각주:11]


자신의 이름을 네오라고 정의함으로써, 그는 현실을 마주한다. 진짜라고 믿었던 가짜들을 모두 털어버리고, 비로소 진실에 닿는다. 그러나 아직까지 '그'(원형)이 되지는 않았다. 여기까지는 모피어스와 같은 수준이라고 할 수 있다. 진짜와 가짜를 구분할 수 있는 존재로의 각성이다.



- 휘게 하려고 생각하지 말아요. 그건 불가능해요. 대신, 진실만을 인식해요.

- 무슨 진실?

- 숟가락이 없다는 진실.

- 숟가락이 없다고?

- 그러면 숟가락이 아닌, 자기 자신이 휘는 거죠.[각주:12]


오라클을 만나러 갔을 때, 네오는 신비한 아이들을 목격한다. 물건을 공중에 띄우거나, 손을 대지 않고 숟가락을 휘게 하는 아이들. 마치 초능력을 행사하는 것처럼 보인다. 두 사람의 대화에서 우리는 다시, 이 매트릭스라는 가상 세계가 어디까지나 프로그래밍 되어 있는 시스템이라는 사실을 인식해야 할 필요가 있다. 보이고 느껴지는 모든 것들은 그저 신호에 불과하다. 숟가락처럼 보이지만, 눈에 보이는 건 숟가락이 아니다. 보다 본질적인 것, 원형을 모방한 복제에 지나지 않는다.


이 사실을 인식하면, 저 숟가락처럼 보이는 복제는 더 이상 숟가락이 아니다. 프로그램 코드에 불과하다. 매트릭스가 전부 이렇게 구성되어 있다. 네오가 숟가락을 휘게 하는 것은 숟가락의 코드를 해킹한 것과 같다. 나아가 네오가 매트릭스의 통제에서 벗어나는 건, 매트릭스 자체를 해킹한 것으로 볼 수 있다. 해킹을 하기 위해서는 진실을 인식해야 한다. 이 세계는 없다는 진실을.



네오는 스미스를 따돌리는데 실패한다. 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던 스미스의 총에 맞아 쓰러진다. 심박은 완전히 멈추고, 네오는 여기서 죽는다. 매트릭스는 가상의 세계지만, 접속자들은 그 사실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해 통제를 받고 데미지를 입는다. 



- 진짜가 아니라더니?

- 생각이 진짜로 만들지.

- 매트릭스에서 죽으면, 여기서도 죽나요?

- 정신이 죽으면 몸도 죽어.[각주:13]


이는 반대로 매트릭스에서 아무리 많은 데미지를 받아도, 정신만 굳건하다면 죽지 않는다는 이야기가 된다. 분명히 네오는 총에 맞아 죽는다. 정확하게 표현하자면 '앤더슨'이라는 가상의 존재가 죽는 것이다. 오라클의 말대로 아직 '그'(원형)로 각성하기 전의 '앤더슨'(가상의 존재)은, 여기서 죽는다.



트리니티의 키스를 받고 살아나면서 비로소 '그'(원형)로 각성하게 된다.


가상의 존재를 죽임으로써 완전한 원형의 형태를 갖추게 된 것이다. 



자신에게 내재되어 있던 가상의 허물을 죽이고, 네오는 이 세계의 진실을 완벽하게 인식하고 있다. 이 세계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저 프로그래밍 되어 있는 거대한 시스템에 지나지 않는다. 네오는 명확한 진실을 바라보게 된다. 때문에 더 이상 매트릭스에 통제를 따르지 않는다. 오히려 매트릭스의 질서를 간섭하고, 자기 스스로 조정할 수 있다. 거짓된 세계 속에서 오롯이 홀로 '진실'이 된다.



총알이 날아오는 것처럼 보이지만, 총알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날아오는 것은 없다. 이 진실을 보는 네오는 총알을 피하는 게 아니라, 아예 멈춰버린다.



프로그램은 일정하게 정해진 패턴에 따라 통제된다. 눈 앞에 보이는 요원은 사람처럼 보이지만, 코딩된 프로그램에 지나지 않는다. 코드가 보이기 때문에 네오는 요원의 공격을 보지도 않고, 한 손으로 막아낸다.



- 어떻게...?

- '그'니까.[각주:14]


이런 네오의 모습을 보면서 모피어스는 자신의 믿음이 틀리지 않았음을 확신한다. 네오가 '그'라고 이야기한다. 정확하게 He is 'the one'. 이라고 말한다. One. 유일한. 이 순간에서 네오는 진정한 '그'(원형)가 되는 순간이다.



네오는 스미스 요원 속으로 침투하여 몸을 빼앗는다. 스미스 요원은 안에서부터 산산조각이 나며 몸을 잃는다. 이는 요원들이 다른 프로그램의 몸을 빼앗는 행위와 비슷하다. 요원들은 매트릭스의 통제를 위해 다른 인간들에게 간섭하여 신체를 빼앗을 수 있다. 이는 매트릭스가 가상이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며, 당하는 대상이 가상임을 전혀 인식하지 못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기도 하다. 그들 입장에서는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알아채지도 못하고 벌어지는 일이다.


네오는 반대로 스미스의 몸을 빼앗음으로써 매트릭스 시스템 자체를 부정하고, 파괴한다. 우리는 예술에서 흔히 '모방은 창조의 어머니'라고 말한다. 어떤 작품을 만들기 위해서는 수많은 모방을 해야 한다. 그 모방을 통해서 새로운 것, 원형이 만들어진다. 네오를 원형이라고 본다면, 스미스 요원은 가상 세계의 통제를 위해 '모방된 존재'로 볼 수 있다. 네오는 스스로 그 안에서부터 새롭게 창조된 것이다.




드디어 원형의 탄생이다.










  1. 『시뮬라시옹』, 장 보드리야르, 민음사, P. 26 [본문으로]
  2. 위와 같음 [본문으로]
  3. 시뮬라크르는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 대상을 존재하는 것처럼 만들어놓은 인공물을 지칭한다. '매트릭스'에 보여지는 세계는 이미 사라져버린 인간들의 과거이기 때문에, 확실하게 존재하지 않는 대상을 존재하는 것처럼 만들어 놨다고 할 수 있다. [본문으로]
  4. 『시뮬라시옹』, 장 보드리야르, 민음사, P. 25 [본문으로]
  5. 영화 『매트릭스』 中 [본문으로]
  6. 위와 같음 [본문으로]
  7. 위와 같음 [본문으로]
  8. 위와 같음 [본문으로]
  9. 위와 같음 [본문으로]
  10. 위와 같음 [본문으로]
  11. 위와 같음 [본문으로]
  12. 위와 같음 [본문으로]
  13. 위와 같음 [본문으로]
  14. 위와 같음 [본문으로]

영화 『매트릭스』분석 : 들어가며



1999년에 사람들에게 많은 충격을 안겨준 영화가 한 편 등장한다. 


이 영화는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이, 사실은 기계에 의해 조작된 '가상의 세계'라고 말한다. 영화관을 나오는 사람들 모두 그럴 듯한 이야기라며 고개를 끄덕인다. 정말 그럴 수도 있겠다, 라는 생각을, 의심을 하게 된다. 단지, 눈만 즐거운 SF액션 영화였다면 지금까지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받지도 못했을 거다. 화려한 액션 뒤에는 훌륭한 연출이 있으며, 그 안에는 '진짜'와 '가짜', 원형(原形)과 모방(模倣)에 대한 깊은 철학적 사고를 품고 있다. 때문에 아직까지도 많은 이들의 입에서 오르내리는 명작으로 남아있다. 


이 영화가 바로 『매트릭스』 시리즈다.





분석에 들어가기에 앞서, 분석의 주제와 방향을 확실하게 정하고자 한다.


분석은 개인의 견해에 불과하다. 옳고 그름은 중요하지 않다. 수학 문제처럼 답이 정해져 있는 게 아니기 때문에, 당연한 이야기다. 그렇다면 분석문을 읽을 때 가장 중요시해야 하는 부분은 무엇인가. 바로 내용이 얼만큼 논리적인가, 비논리적인가를 따지는 일이다. 내용이 논리적이었다면 수긍할 수 있을 것이고, 그렇지 않다면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는 건지 전혀 이해하지 못할 수도 있다. 『매트릭스』 시리즈는 이미 많은 사람들이 분석을 했고, 이 말은 다양한 시선으로 접근했다는 이야기가 된다. 필자가 보려는 시선도 그리 다르지는 않다.


이전에 『시뮬라시옹』에 대해 언급해야 한다. 이 이야기를 하지 않고서는 분석을 진행할 수 없다. '시뮬라시옹'이란 '시뮬라크르 하기' 혹은 '시뮬라크르 하다'라는 동사적 의미로 쓰인다. '시뮬라크르'란 '진짜 보다 더 진짜 같은 복제'를 의미한다. 『매트릭스』는 이 이론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영화이기 때문에, 시뮬라시옹과 시뮬라크르를 빼놓고는 영화를 이야기할 수 없다.


감독을 맡은 워쇼스키 형제(지금은 남매)는 주연 배우들 모두에게 『시뮬라시옹』 책을 나눠주었고, 그들 모두가 책을 읽고 내용을 숙지하도록 요구했다. 그러니 분석을 하기 위해서는 우리 역시 『시뮬라시옹』을 함께 펼쳐봐야 하는 것이다. 이 책에 대해서는 이전에 리뷰를 한 적이 있다. 궁금하다면 여기를 참고하길 바란다.


시뮬라시옹에 대해 이야기하기 위해서는 '원형'과 '복제'에 대해 구분을 짓는 편이 좋다고 생각해, 이 영화에서 '원형'과 '복제'를 상징하는 두 인물을 중심으로 분석을 하도록 하겠다.




'원형'을 나타내는 인물은 주인공 '네오 NEO'다.


이름에서부터 자신이 원형이라는 걸 알리고 있는데, 영어 슬펠링 NEO를 거꾸로 쓰면 OEN이 된다. 하나. 수많은 것들 중 오직 하나로 존재하는 것. 원형. 이름 뿐만 아니라 영화 곳곳에서 자신이 유일무이한 존재라는 사실을 보여주는 장면이 여럿 있다. 이는 본문에서 하나 씩 살펴보도록 하자.




'복제'를 나타내는 인물 전직 요원 '스미스'다.


스미스는 두 번째 시리즈인 『매트릭스 2 : 리로리드』에서부터 다른 프로그램이나 인격체를 자신의 모습으로 강제 복제 시키는 능력을 보여준다. 이 행동만 봐도 그가 '복제'의 대표적인 인물임을 알 수 있다.



앞으로 진행될 본문에서는 이 두 인물을 중심으로 영화에 나타나는 현상을 설명하도록 하겠다.

오리지널, 그리고 복제에 대해 『시뮬라시옹』



이론서나 철학서는 언제나 긴장한 상태로 읽게 된다. 어느 한 순간 내용에 심취하여, 마치 책의 내용이 세상의 유일한 진리인 것처럼 받아들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맹목적이고 광적인 믿음은 언제나 위험하다. 이성은 항상 의심하라 말한다. 때문에 이런 책을 접할 때는 이성을 칼 같이 갈아두고 읽어야 한다. 나 스스로를 보호하고, 내 세계를 보다 강하고 견고하게 다지기 위해서 말이다.


책 제목인 '시뮬라시옹'은 Simulation 시뮬레이션의 불어 발음이다. 시뮬레이션으로 표기되지만, 갖고 있는 의미가 다르다. 사전을 찾아도 '시뮬라시옹 이론'이 따로 나와 있다. 이 책은 시뮬라시옹 이론을 담고 있는 이론서다. 원제는 『Simulacres & Simulation 시뮬라르크와 시뮬라시옹』이다. 


'시뮬라시옹'이란 '시뮬라크르'의 동사형, 즉 '시뮬라크르 하기'이다. 그렇다면 우선 시뮬라크르가 무엇인지 알 필요가 있다.


시뮬라크르는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대상을 존재하는 것처럼 만들어놓은 인공물을 지칭한다. 의미가 복제나 위조, 모방과 겹치지만, 결정적인 차이가 있다. 시뮬라크르는 실제, 원본 이미지 그 자체로서 현실을 대체하고, 현실은 이 시뮬라크르의 이미지에 지배 당하게 된다. 현실보다 더 현실적인 인공물. 그게 시뮬라크르다. 책에서는 이 내용을 설명하면서 현대 전쟁을 예로 든다. 


미사일 발사는 화면이라는 컴퓨터로 보면서 하지 실제 미사일의 움직임을 육안으로 보면서 하지 않는다. 이때 시뮬라크르인 화면상의 미사일 궤도는 실제 탄의 궤도일 것이며, 더 나아가 실제 탄이 목표에 맞았는지 맞지 않았는지는 이제는 중요치도 않게 되어버렸다. 결국 시뮬라크르는 실제보다 더 실제적인 것이다.

- 『시뮬라시옹』 中


 





무슨 말인지 난해할 뿐이다. 이해하기 위해서는 읽고, 읽고, 읽기를 몇 번이나 반복해야 한다. 형광펜을 꺼내들고 밑줄까지 그어가며 읽었다. 여전히 내게는 난해한 이론이지만, 어렴풋이는 알 수 있을 것 같다.


애초에 책에 있는 내용을 모두 이해하고자 한다면, 그건 욕심이다. 그런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책을 사용하는 방법에서 이야기했듯, 책 본연의 목적은 '사고를 하게 하는 것'이지 '지식의 전달'이 아니다. 책 내용을 전부 이해하지 못했다고 해서, 잘못된 독서를 한 건 아니다. 어떤 식으로든 독서가 당신의 생각에 영향을 미쳤다면, 충분히 훌륭한 독서를 한 거다.





본문보다 각주 내용이 더 길다. 이런 책은 처음이었다. 순간 지나가면 본문을 읽는 건지, 각주를 읽는 건지 알 수 없게 되어 버린다.


사실, 내가 이 책에 관심을 갖게 된 이유는 영화에 있다. 영화 『매트릭스』에 대해 분석문을 쓰기 위해서 처음 이 이론을 접했다. 『매트릭스』의 제작자 워쇼스키 형제(남매)는 『시뮬라시옹』을 모티프로 영화를 제작했다고 밝혔다. 주연 배우들에게는 직접 이 책을 건네주고 읽도록 했다. 영화에서는 '매트릭스'라는 가상 세계에서 벌어지는 사건을 다루고 있다. 가상 세계. 시뮬라크르. 해서 이 영화를 분석하기 위해서는 『시뮬라시옹』에 대한 이해가 필요했다.





영화 초반, 해커로 활동하며 복제 프로그램을 판매하는 앤더슨(키아누 리브스)의 모습이다.

판매하는 복제 프로그램을 보관해둔 저 책의 제목이 보이는가? 바로 이 『시뮬라시옹』이다. 이 영화는 시뮬라시옹을 이해하는 관점에서 분석하면 완벽하게 이해할 수 있다. 이미 수많은 사람들이 매트릭스에 대해서 다양한 관점을 가지고 분석을 했다. 단순히 영화적인 관점부터 시작해서 종교적인 관점으로 분석한 이도 있다. 충분히 근거가 있고 논리적으로 타당한 분석들이 많지만, 그래도 나는 시뮬라시옹을 빼놓고 이 영화를 말하는 건 어불성설이라고 생각한다.


『시뮬라시옹』의 저자 '장 보드리야르'는 자신의 이론은 소설이나 영화 같은 이야기로 풀어낼 수 없는 것이라고 단적으로 말했지만, 개인적으로 느낄 때 『매트릭스』는 그의 이론에 충실한 면이 많이 있다. 이에 대해서는 따로 리뷰를 쓸 예정이다. (그렇지만 분석문을 쓰는 일은 언제나 피곤한 작업이기 때문에......)





가상세계와 현실. 실제와 부제. 오리지널과 복제. 이에 대해 심오한 생각을 하고 싶다면 이 책을 추천한다.

그리고 나처럼 영화 『매트릭스』의 분석문, 논문을 써야 할 학도들에게도.


맛있는 훗카이도 여행을 그리며 『행복의 맛, 삿포로의 키친』



여행의 즐거움은 새로운 미지를 경험할 수 있다는 기대에 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새로운 먹거리를 경험할 수 있다는 기대.


여행에서 남는 건 사진 뿐, 이라는 말에 담긴 뜻은 '여행에서 먹은 음식들은 모두 소화가 되지만, 사진은 남는다'라는 뜻이다.


개인적으로 여행을 가면 항상 현지 음식을 먹는 편이다. 라면을 싸 가거나 고추장을 챙겨가는 건 가방에 자리만 차지하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문화를 체험하기 위해서 가장 좋은 방법은 음식은 먹는 것이다. 음식의 재료나 간, 형태 같은 것만 봐도 지방의 특색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역사를 공부하거나 언어를 배우지 않아도, 음식을 먹으면 그 문화를 몸 속 깊이 체험할 수 있다. 물론, 역사나 언어를 배우는 것도 중요하지만 나를 비롯한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런 준비를 하지 못한 채 여행을 떠난다. 그러니 음식이라도 먹어야 한다. 진정한 여행은 현지의 음식을 먹는 순간으로부터 시작된다.






올해 2월에 삿포로를 다녀왔다. 도쿄나 오사카는 다시 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는데, 삿포로는 다시 가고 싶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해서 이번 달(12월)에 다시 한 번 훗카이도를 방문하기로 했다. 오예!


삿포로에서 먹은 것들은 하나 같이 다 맛있었다. 사전에 전혀 준비를 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만족하지 않은 식사가 없었다. 특히 해산물 요리는 일품이다. 포장해서 판매하는 초밥이, 우리나라 어지간한 초밥집 보다 맛있다. 방문했던 온천에 유명한 인도 커리 식당이 있었다. 난 아직도 그 커리 맛을 잊지 못한다.


워낙 먹거리가 많다보니 이번에는 조금 알아보고 가기로 했다. 이왕 먹을 거 제대로 먹으면 좋지 않은가. 해서 이 책을 샀다.





지은이 김윤지(지니어스 덕)는 일본 유학 시절에 자신이 먹었던 음식들을 하나 씩 그림으로 그리기 시작했고, 그 결과가 바로 이 책이다. 현지에서 생활했던 사람의 개인적인 감상이 소소하게 적혀있다. 광고 블로그에서 무조건 추천하는 그런 글이 아니라, 정말 개인적으로 지극히 현실적인 평을 써내려간다. 읽고 있으면 눈이 내리는 풍경을 보고 있는 것처럼 마음이 차분해지는 글이다.





작가가 그린 음식 일러스트가 중간 중간 등장한다. 보고 있노라면 당장 저 가게로 쳐들어가고 싶은 충동이 인다.

배가 고파지는 책이니, 다이어트를 하고 있다면 보지 않는 걸 추천한다.





책을 통해서 알게 된 사실인데, 삿포로는 매년 디저트 대회가 열릴 정도로 디저트 음식이 발달된 곳이라고 한다. 미처 몰랐던 사실. 곰곰히 생각해보면 그럴 듯한 이유가 있다. 훗카이도는 일 년 중 6개월은 눈이 내리는 곳이다. 그 추위를 이겨내기 위해서는 충분한 영양분, 당분이 필수적이다. 때문에 이런 디저트 음식이 발달하게 됐다고 생각할 수 있다. 겨울에 나오는 간식들, 예를 들면 붕어빵 같은 것만 생각해도 이해할 수 있지 않은가. 고 당분의 고 칼로리.


이것 보시라. 음식만 알아보는 것으로도 지역의 특색을 알아갈 수 있다. 

그러니까 우리는 먹어야 한다!

그것이 여행의 목적이다!





훗카이도 여행을 계획하고 계신 분들이라면, 이 책을 읽고 맛있는 여행을 그려보시길♡



(Ps. 살이 찌는 것은 어쩔 수 없습니다. 그냥 즐기세요.)


가치를 만들도록 도와주는 지도 『지적 대화를 위한 넓고 얕은 지식』



2014년에 출시된 이 인문학 도서는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았고, 현재까지도 인문학 코너 베스트에 꽂혀있다. 서점에 등장하자마자 몇 페이지 훑어보고 바로 업어온 책이다. 그리고 다른 분들과 마찬가지로 아직까지도 전부 읽지 못했다. 사실, 솔직하게 말하자면 다 읽었는지 어쨌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왜인지 이런 책은 조금씩 조금씩 보게 되는데, 그때마다 잡고 펼치는 부분부터 읽어서 그런 것 같다. 나만 그런가?


쉽게 들고, 쉽게 펼치고, 쉽게 덮는 게 가능한 책이다.


담고 있는 내용을 감안하면 쉽게 들리지도, 펼쳐지지도 않을 것 같지만 굉장히 가벼운 책이다. 즐겁고 가벼운 마음으로 독서가 가능하다. 안에 담긴 내용은 훌륭하다.





총 두 권으로 나누어져 있으며 역사, 경제, 정치, 사회, 윤리 / 철학, 과학, 예술, 종교, 신비에 대한 지식을 담고 있다.


역사, 경제, 정치, 사회, 윤리는 현실에 맞닿아 있는 주제고, 철학, 과학, 예술, 종교, 신비는 현실 너머의 문제를 다루는 주제다. 여기에 있는 주제를 전부 섭렵하고 관심 갖는 사람은 별로 없으리라. 나 같은 경우는 현실 너머의 문제는 언제나 관심을 가지고 있었지만, 현실에 맞닿아 있는 주제는 별로 눈을 돌리지 않았다. 이 책에서는 나 같이 눈을 돌린 사람도 이해할 수 있도록 쉽게 내용을 풀어두었다.


순서가 별 거 아닌 것처럼 보이지만 이해하기 쉽도록 중요한 뼈대를 순차적으로 배치해두었다. 처음 읽을 때는 처음부터 차근차근 읽기를 권한다. 





하나의 주제에 대한 내용이 끝날 때면 최종 정리를 통해서 이해를 도와준다. 역으로 최종 정리를 먼저 읽은 후에 앞에 내용을 더듬어가며 읽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최종 정리를 읽고도 이해가 되지 않는다면, 책을 다시 읽으면 된다.





이 책이 당신이 살아갈 인생의 편리한 지도가 되길 바란다.

이 지도를 들고서 어디를 가든 누구를 만나든 대화하고 위로 받을 수 있기를 바란다.


인생의 의미와 깊이는 타인과의 대화 속에서 비로소 빛을 낸다.


- 『지적 대화를 위한 넓고 얕은 지식』 中



우리는 책에서 많은 것을 얻고, 배우지만 그것만으로 가치가 만들어지진 않는다.

가치는 언제나 책 밖에서 만들어진다.


이 책은 당신이 새로운 가치를 만들어 내도록 도와줄 수 있는 훌륭한 지도가 될 수 있다.

당장 이 지도를 얻으러 가시라.


논술 학원 선생하면서 학부모들에게 많이 들었던 질문 Q&A




단기간이지만 논술 학원 선생을 하면서 꽤 많은 사실을 알 수 있었다.

그 중 하나는 학부모들이 아이들에게 독서를 시키기 위해 부단한 노력을 하고 있다는 거다.

이번에는 그에 대한 이야기를 조금 해보려고 한다.





Q : 아이가 책을 읽지 않아요. 어떻게 하면 책을 읽을까요?


A : 책을 친근하게 만들어줘야 한다. 집어던지든, 낙서를 하든, 씹어 먹든. 일단 책을 낯설어하면 펼쳐보는 일은 절대 일어나지 않는다. 책을 친근하게 만드는 방법 중 하나는 부모가 독서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다. 백이면 백, 독서하는 부모를 보면서 자란 아이들은 책을 가까이 두게 된다. 이건 경험이기도 하다. 팁을 하나 제안하자면, 아이에게 책을 읽으라고 하지 마라. 대신 책을 가까이두고 심심하게 만들어라. 무료함을 견디지 못한 아이는 책을 집게 될 것이다.



Q : 폰을 사줬더니, 손에서 폰을 놓질 않아요.


A : 당연한 일이다. 폰이 제공하는 미디어, 게임 등은 쉬운 자극제다. 손가락만 몇 번 움직이면 화면에서 뿅뿅 하며 화려한 이펙트가 아이들의 시선을 강탈한다. 책은 느린 자극제다. 천천히 읽고, 읽어서 끝을 봐야 비로소 자극이 서서히 올라온다. 제대로 독해하지 못하면 그마저도 미미한 수준이다. 독서의 즐거움은 굉장하지만 스스로 깨닫기 전까지는 극히 소소한 즐거움이다. 게임은 금방 빠지지만, 독서는 그럴 수가 없다. 인내해야 한다. 게임을 하는 시간만큼 책을 읽게끔 해도, 효과는 조금씩 일어나고 있는 거다. 나쁜 건 바로 보이고, 좋은 건 눈에 띄지 않는 법이다. 인내해야 한다.



Q : 만화책만 읽어요. 어떻게 하면 좋죠?


A : 독서라는 행위를 하는 것에 감사하자. 대개 학부모가 말하는 만화책이란, 교육용으로 제작된 Why 시리즈, 마법 천자문 같은 것들이다. 개인적인 소견으로는 이 책들은 만화책 수준에 끼지도 못한다. 아이가 만화책방에서나 볼 수 있을 일본 만화를 보는 게 아니라면, 기꺼이 환영할 일이다. (물론, 일본 만화가 나쁘다는 건 아니지만 어린 아이의 정서에는 맞지 않는 것들이 많기 때문) 시리즈를 다 읽었으면 다른 장르의 교육 만화책을 사주면 된다. 필자는 삼국지, 초한지 같은 중국 역사를 만화로 읽었다. 삼국지를 세 번 읽은 사람과는 말싸움도 하지 말라고 했는데, 80여권이 넘는 책을 여덟 번은 넘게 읽은 것 같다. 덕분인지는 모르겠지만 대학 토론 수업 때, 논파(論破) 당한 적이 한 번도 없었다. 만화책도 만화책 나름이다. 아이에게 보여주고 싶은 장르의 교육 만화를 찾으면 된다. 책을 손에서 놓는 것보다는 긍정적이다.





Q : 책을 훑어 보는 것 같아요. 너무 빨리 읽어서 정작 내용은 잘 기억하지 못해요.


A : 독서는 책을 외우는 게 아니다. 애초에 책의 용도가 그런 것이 아니다. 책을 통해 우리가 어떤 사유를 할 수 있느냐가 문제다. 책 내용 기억을 운운하는 건, 주입식 교육에서 문제를 풀 때나 하는 짓이다. 아이가 책을 읽었다면 '무슨 내용이었어?'라고 묻는 대신 '어느 부분이 재미있었어?'라고 묻는 편이 좋다. 아이가 다시금 책의 내용을 떠올릴 수 있도록 해주라는 말이다. 애초에 읽은 책 내용을 기억하는 사람이 몇이나 되나. 읽은 책의 내용은 기억하지 못하는 게 정상이다. 만약, 아이가 한 번 읽은 책의 내용을 완벽하게 기억한다면 뇌 어딘가에 이상이 있는 게 틀림없으니, 반드시 검사를 받아라.



Q : 애가 어떤 책을 읽으면 좋을까요?


A : 애가 읽고 싶은 책을 읽게 해라. 서점에 가서 애들 책을 고르지 말고, 아이들 스스로 책을 고르게 해라. 애들 눈에 재미있어 보이는 책은 애들이 안다. 부디 아는 척 하지 말고, 아이들에게 선택권을 줘라.



외에도 많은 문의가 있었지만, 개인적으로 꼭 필요한 내용이라고 생각했던 것들만 적었다.

궁금한 점을 댓글로 남기면, 아는 만큼 성심성의껏 답하도록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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