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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들일 수 없는 작가 이외수의 초기작 『들개』


개인적으로 이외수 작가는 손가락에 꼽을 정도로 문학 업적을 많이 남긴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SNS를 이용한 소통을 가장 잘 하는 작가기도 하다. 젊은 시대를 수용할 줄 아는 늙은 작가의 아우라는 새로우면서 익숙한 느낌이랄까. 최근에 발표한 작품 『보복대행전문 주식회사』만 봐도 그렇다. 제목이 어디 노인네가 쓴 글이라고 짐작이나 하겠나. 이외수라는 지은이를 확인하기 전까지, 나는 갓 등단한 작가의 풋내 풍기는 작품이라고만 생각했다. 『하악하악』을 봤을 때는 이 노인네는 뭐하는 사람인가 싶었다. 내용을 보기 전까지는.


이후 그의 작품을 읽어보겠노라 생각하고, 되도록 초기작을 찾아봤다. 『들개』는 이외수의 초기 장편 소설이다.



이야기는 소설을 쓰고 싶어하는 여자와 그림을 그리고 싶어하는 남자가 만나면서 시작된다. 여자는 비어있는 학원 건물에 몰래 숨어 산다. 남자는 이혼에 직장도 때려치고 나온 빈털털이다. 남자는 그림을 전공했다. 자신만의 순수한 작품을 그리고 싶은 욕망이 가득하다. 남자는 여자와 같은 건물 2층에 작업실을 만들고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다.


"이거 모두 언제 그리신 거예요."

"대학 다닐 때 그린 게 압도적으로 많습니다. 직장을 가진 다음부터 내 그림은 시름시름 병을 앓기 시작했어요. 보십시오. 저쪽 벽에 있는 것들, 뭔가 다르지 않아요?"
"다른데요."

정말이었다. 그가 손가락질한 벽에 걸려 있는 그림들은 어딘지 모르게 분위기가 쳐져 있는 듯한 느낌이었다.

"이것들 모두 늑댄가요?"

"늑대가 아닙니다."

"그럼 승냥이?"

"그것도 아닙니다."

"어쩐지 개 같지는 않은데."

"그것들은 갭니다. 그러나 집개가 아니라 들개죠."

"들개?"

"야생견을 말하는 겁니다."


- 이외수의 『들개』 中


남자는 청량음료 회사에 다니면서 광고 그림을 그렸다. 그러면서 자신이 가지고 있던 야생의 감각을 잃어갔다. 순수하게 그림만을 위한 그림을 그리지 못한 게 원인이었다. 남자는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쳐서 다시 들개를 그리려 한다. 그리고 마침내 남자는.......



분량에 비해 읽는 시간이 오래 걸리지는 않는다.


사실, 어떻게 읽었는지 모를 정도로 빠르게 읽을 수 있다. 전개와 호흡이 빠르고, 눈에 쉽게 읽히는 문장이다. 책을 읽으면 이외수가 가지고 있는 문학적 기술이 얼마나 뛰어난지 알 수 있다. 이따금 위와 같은 표현, '그림을 그리고 있는 것이 아니라 캔버스에다 뼈를 깎아 붙이고 있는 것'을 보면 잔잔한 가슴에 돌을 던지는 것 같은 느낌을 받는다. 이렇게 조금씩 물결이 쌓이고 쌓여서, 작품이 끝날 쯤엔 거대한 파도가 되어서 가슴으로 쏟아져 내린다.


실력 없는 글쟁이들, 예를 들자면 나 같은 녀석들은 잔잔한 물결을 일으키지도 않고 파도를 만들려는 억지를 부린다. 그러면 개연성이 성립하지 않고, 글은 호소력을 잃는다. 알면서도 막상 쓸 때는 잘 되지 않는 일이다. 이걸 자연스럽게 글 속에 녹이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한 줄의 시(詩), 한 악장의 심포니, 또는 한 폭의 그림 따위들은 결단코 설명되어 지거나 해석되어서는 안 되며 다만 느끼어지는 것이라고 나는 언제나 고집하며 살아왔었다. 따라서 그 잘나빠진 고교입시나 대학입시용 참고서에서 만해 한용운 선생의 「복종」이나 라이너 마리아 릴케의 「가을날」 등이 조잡한 이론가들의 녹슨 칼끝에 난도질당해져 있는 것을 보면 차라리 나는 혐오감 때문에 죽고 싶다는 생각까지 들 정도였다. 시란 표본실의 청개구리가 아닌 것이다. 배를 가르고 내장을 드러내고 허파가 어떠니 콩팥이 어떠니 왈가왈부해봤자 더욱 시에 대한 눈이 멀어져갈 뿐이다. 물론 내가 여기서 이야기하는 시란 수사법상 제유법적으로 사용된다. 그러니까 시를 음악이나 미술로 바꾸어 말한다 해도 마찬가지라는 얘기다. 혹자들은 말한다. 이 시는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어 너무 어려운 시야, 라고.


그러나 어려운 것은 시가 아니라 그렇게 말하는 사람의 시에 대한 편견이다. 도대체 시를 이해하려 든다는 것부터가 무모하다. 시가 감상되는 것이라는 기초적 상식을 버리고서는 도저히 시에 근접할 수가 없는 것이다.


나는 소설을 쓸 때 언제나 그것을 염두에 둔다. 따라서 내 소설 또한 감상되기를 바라며 결코 설명되기를 바라지는 않는다. 나는 되도록이면 언어 자체를 생물로 만들려고 노력한다. 그것은 추상이 아니라 구상이다. 나는 소설이 단순히 스토리 때문에 읽혀지는 것이라고 생각지 않는다. 그것은 언어의 동작들이 가지는 아름다움 때문에 읽혀지는 것이라고 나는 생각해 왔다. 언어의 동작이라니, 미친놈이로군, 하는 식의 반응을 보이는 분들께는 더 이상 말해 드릴 방법이 없다. 그분들은 이미 그분들의 의식 속에서 관념이라는 덮개로 언어를 뒤덮어 질식시켜 버린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 「작가가 말하는 작품세계」 中...이외수 『들개』에 수록


학교를 다니면서 작품에 대해서 공부를 할 때는 언제는 분석을 했다. 이제는 분석 자체에 즐거움을 느끼게 됐다. 그러다 도저히 이유를 알 수 없는 작품을과 마주하면 '그래, 이게 맞지'라는 생각을 한다. 애초에 작품을 분석하려는 시도 자체가 무의미하다. 작품은 감상하는 것이다. 이 사실을 잘 모르겠다고 하는 사람들에게 이 책을 권한다.


책의 마지막 장을 덮을 쯤에는, 도대체 이게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는 건지 모르겠지만서도 가슴으로 밀려오는 파도를 느낄 수 있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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